박근혜 대통령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35주기 추도식이 26일 오전 국립서울현충원의 박 전 대통령 묘역에서 엄수됐다. 추도식은 정·관계 인사, 박 전 대통령 지지자 수천명이 참석한 가운데 민족중흥회 주관으로 열렸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추도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추도식은 박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추모하는 모임이 주관해 열리는 행사다. 박 대통령은 예전에는 매년 유족 대표 자격으로 참석해 왔다.박 대통령은 그러나 대통령 신분으로 민간 주최 행사에 참석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판단에 따라 이번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 동생 근령씨와 지만씨도 참석하지 않았다. 지만씨는 수일 전 현충원을 다녀간 것으로 알려졌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엔 추도식에 앞서 개인 자격으로 미리 박 전 대통령 묘역을 찾아 참배했다. 올해 역시 미리 찾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청와대는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어머니 육 여사 서거일인 8·15광복절에 열린 추도식에 참석하지 않았고, 며칠 앞서 현충원을 찾았다. 이날 행사에는 황우여 교육부 장관, 새누리당 이인제 최고위원과 나경원 의원, 한광옥 국민대통합위원장 등이 참석했다. (故) 김대중
●세월호 결심공판정, 눈물의 호소 줄이어●...세월호 참사 실종자 10명 가운데 1명인 경기도 안산 단원고 체육교사 고창석(40)씨의 부인 민아무개(36)씨는 21일 법정에 나와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며 시커멓게 타버린 심경을 눈물로 털어놨다. 수학여행을 떠나던 날 새벽, 집을 나서는 남편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못했던 것이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민씨는 이날 광주지법 형사11부(재판장 임정엽) 심리로 열린 세월호 선원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고 교사는 제자들의 탈출을 도우려고 배 안으로 들어갔다가 실종됐다.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주검이 인양돼 사람들이 달려들 때마다 남편이 아니기만을 바랐던 그는 “이젠 남편의 뼛조각이라도 찾아내 어린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민씨는 “너희 아빠 죽었어, 살았어?”라는 친구들의 질문에 고민하던 아이가 “정말 아빠 볼 수 없어요?”라고 물을 때마다 “가슴이 찢어진다”고 했다. 그는 엄마마저 사라질까 두려워하는 9살·7살 아이들이 “(배를) 운전한 아저씨는 어떻게 됐어요?”라고 물었던 일을 이야기하다가 눈물을 터뜨렸다. 그는 “선원들은 지금도 범행을 부인하고 있다. 퇴선명령만 있었다면 많은 사람들이 살 수가 있
일평생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구현하기 위해 애쓴 노(老) 목사의 한 세기 삶에 한국교회는 머리 숙여 깊은 존경심을 표시했다. 그의 마지막을 추모하는 자리는 슬픔과 탄식이 아니라 끝없는 복음전파와 한국교회 연합운동을 위한 다짐으로 가득했다. 14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대강당에서는 지난 10일 103세를 일기로 소천한 고 방지일 목사의 장례예배가 열렸다. 한국기독교회장으로 드려진 예배에는 교단과 교파를 초월해 1000여명의 목회자와 성도가 모여 신앙과 언행의 일치를 실천한 방 목사의 삶을 되새겼다.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증경총회장 림인식 노량진교회 원로목사는 ‘본받으라’를 제목으로 한 설교에서 “방 목사님은 ‘장수’를,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받은 복으로 여기시며 고령이 될수록 고삐를 늦추지 않고 힘껏 복음전파의 사명을 다하셨다”며 “이로써 만 70세에 은퇴하면 마땅히 쉬어야 한다는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안일한 태도에 경종을 울렸다”고 밝혔다. 또 “인종과 계급, 격식 등을 따지지 않고 사역을 하셨던 예수님처럼 방 목사님은 수십 년간 중국선교를 하고 교파를 초월해 목회자들에게 성경강해와 목회지도를 하는 등 ‘초월목회’의 본을 보이셨다”고
지난 13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은 초가을 주말을 즐기러 나온 가족, 연인들로 북적였다. 공원을 찾은 사람 중엔 특별한 나들이에 나선 가족들도 있었다. 2000년부터 지난해까지 생애 마지막 순간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고 202명의 생명을 밝힌 뇌사 장기 기증자 41명의 가족들이 전국에서 모인 것이다. 뇌사 장기 기증인을 기리기 위한 국내 첫 '일일 추모공원' 행사였다. 이날 공원 북쪽 피크닉장 나무 41그루에는 'donor'(기증인)라고 쓰인 빨간 리본이 달렸다. 숨질 당시 네 살이었던 왕희찬군부터 고 박순임씨(숨질 당시 71세)까지 뇌사 장기 기증자의 사진, 생년, 사망연도를 담은 아크릴판 기념비가 각 나무 아래에 놓였다. 사망연도 뒤에는 빨간 물결(~) 표시가 있었다. 이들의 생명 나눔이 다른 생명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의미였다.'2007~2010~'. 희찬이의 기념비 앞에 아빠 왕홍주(50)씨, 엄마 송미정(48)씨, 동생 수현(4)이가 찾아왔다. "수현아, 나무도 많고 넓은 곳에 오빠랑 같이 나오니까 좋지?" 희찬이가 세상을 뜨기 두 달 전에 태어난 수현이는 어느덧 오빠 또래가 됐다. 수현이가 사진 속 어린 오빠의 사진을 어루만졌다.
●100일간 온 나라를 뒤흔든 자 최후의 키워드●100일이 넘도록 대한민국을 온통 뒤집고 흔든 세월호 침몰사고는 유병언이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또 온 나라를 뒤흔들고 있다. 순천 땅 허허로운 밭에서 비참한 모습으로 발견된 시신이 여러가지 조사를 거쳐 유병언의 시체가 맞다는 전제하에 기사를 쓸 수 밖에 없는 것이 아직은 찜찜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정확도가 99.99%라는 DNA 검사를 통한 결과라니 일단은 믿고 기사를 쓰기로 한다. 70평생 풍운의 사나이라면 거창할 수 있겠으나 천문학적인 재물을 주무르고 수 만 명의 종교적 추종자를 거느리며 고상한 예술활동까지 지구촌을 무대로 자유롭게 펼치며 화려하게 살아 온 일생임은 틀림없다. 그런데그 마지막이 너무나 비참하다. 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한모습 옆에 소주 2병, 막걸리 1병이 그의 마지막 반려자였단 말인가 ? 그가 마지막 차지한 지상 면적은 또 얼마나 되었으며 그 또한 축축한 풀밭이었다. 반듯이 위를향한 모습이었다니 그가 마지막 본 이 세상은 푸른 하늘아니면 별하늘이었을 것이다. 그가 가진 책자의 제목은 "꿈 같은 사랑", 그리고 명품을 착용한 채 술병을 친구 삼았고, 홀로인 채 하늘을 향한
“생활력 강하신 엄마는 참으로 부지런하고 모든 일에 열심히셨죠. 혼자 몸으로 밤잠 안 주무시고 삯바느질 하시어 우리 삼남매를 키우셨죠. 어떤 때는 우리가 밥을 다 먹어 치우고 빈 솥단지만 남겨 놓았을 때, 일하고 돌아오신 엄마는 부엌에서 맹물 한 사발 들이키고 주무셨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 때 저희 삼남매 철이 없어 몰랐어요.…이하 생략” 제1부 그리움 -작은 딸-“이렇게 혼자 와 보고 싶었어요. 꼭 혼자 와 보고 싶었어요. 그래야 마음껏 울어도 보고, 보고 싶다 말도 해 볼 수 있으니까요. 오늘은 어머님이랑 당신한테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치마도 입고 왔어요.…이하 생략” 제2부 사랑 -남편을 먼저 보낸 어느 아내-“아빠! 나 왔어요. 울지 않으려고 예쁘게 화장도 하고 왔는데, 오는 발걸음 한 걸음마다 눈물이 멈추질 않네요. 아버지, 살아생전에 불러본 적 없는 그 이름.…이하 생략” 제3부 고마움 -딸이-“그래도 한번쯤은 들여다 볼 줄 알았는데… 평안하신가보오. 허기사 이곳보담이야 어련하시겠소?//밉소…아직도 사랑타령이나 할 만큼 너무 많은 추억을 주고 간 당신이 너무나 밉소//보고싶어 견딜 수 없을 땐 시리도록 파란 하늘이 눈 안에 들어오는데 그 곳에 당
피아니스트이자 영화음악가인 지박(Ji Bark)이 세월호 참사 100일째인 24일, 추모곡을 헌정한다. 곡의 제목은 Dear. Mom. ‘엄마, 울지 마세요. 저는 잘 있어요.’의 뜻이 담긴 가사로 시작하는 이 곡은 세월호 희생자를 위로하는 기존의 추모곡들과는 달리,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아이가 슬퍼하는 엄마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내는 내용이 담겨 있다. ‘엄마 울지 마세요. / 저는 잘 있어요. / 괜찮아요. 비록 지금은 우리가 떨어져 있지만 / 저는 항상 엄마 마음 속에 있을 거에요/(중략) 우리가 언젠가는 꼭 만날 거라는 걸 /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에서 / 눈물이 없는 그 곳에서/ 더 이상 안녕이라는 / 말 조차 필요 없는 그 곳에서 - 지박의 추모곡 Dear. Mom 가사 중에서 지박은 “가슴 아픈 참사를 지켜보며, 많이 울었다. 대참사가 벌어진 지 100일 다 되도록, 가장 슬프고 힘든분들은 가족분들 일 것이다. 그런 가족을 하늘 나라에서 지켜보는 아이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지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고 전하며, 아직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실종자의 가족들과 진상 규명을 위해 애쓰는 유가족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수 있길 바라는
만델라 딸 "아버지 마지막은 고통스럽지만 아름다워"고(故)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공화국 전 대통령은 숨지기 전 몇 달을 매우 고통스럽게 보냈지만 마지막 숨은 평화로웠다고 그의 딸이 회고했다. 만델라의 생일(7월 18일)을 앞두고 큰딸 마카지웨(마키) 만델라는 16일(현지시간) CNN 방송 인터뷰에서 만델라의 마지막 순간을 '아름다운 임종'이었다며 오랫동안 병과 싸워왔기에 그의 죽음과 장례식은 안도로 다가왔다고 밝혔다. 그는 "의사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것을 다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지만, 딸인 나에게 그것을 보는 것은 매우 괴로웠다"고 말했다.만델라는 숨지기 전 1년 동안 신장 투석을 하고 인공호흡에 의지했으며, 정맥 주사로 영양을 섭취했다. 그의 팔과 손은 항생제를 비롯한 다른 약물을 주입하는 정맥주사 때문에 부어 있었다. 누워만 있는 그에게 삶의 질은 없었다고 마카지웨는 말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데스먼드 투투 주교는 최근 가디언에 기고한 글에서 '조력 자살'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히면서 만델라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연장하고 제이콥 주마 대통령이 말도 못하는 만델라와 TV에 출연한 것은 고인의 존엄에 대한 모독이었다고 비판한 바 있다.마카지웨 역시 왜
한인이 미국으로 이민간 것은 언제·어디일까? 하와이 독립운동 사적지 탐방을 위해 떠난 대한민국의 대학생들이 미국 첫 한인 이민자의 무덤을 찾아 추모했다. (사)건국이념보급회(회장 인보길)가 주최하고 국가보훈처가 후원하는 하외이 독립운동 사적지 탐방 행사에 참석한 18명의 대한민국 대학생들은 24일(현지시간) 김효선 사무총장 인솔로 하외이 빅아일랜드 힐로에 위치한 알라에 한인공동묘지를 찾았다.알라에 한인공동묘지는 1939년 처음 만들어졌고 한인들의 무덤은 156개가 있다. 1998년 대한민국 정부는 하와이 빅아일랜드 힐로 알라에 한인공동묘지에 한인이민조상기념비를 만들었다. 이날 한인공동묘지를 찾은 한 대학생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동포들이 어디서 어떤 경로를 통해 왔는지 늘 궁금했는데 하와이에 최초로 이민을 온 한인들의 흔적을 발견하고 난 뒤 그 의문이 풀렸다"며 "미국 한인동포의 뿌리가 대한제국 시기에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로 왔던 이민자였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됐다"고 말했다. 1902년 12월 대한제국의 한인 102명이 인천항(당시 제물포항)을 출발해 1903년 1월1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한인의 첫 미국 이민자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
★<본사 제작 격조높은 추모곡> '천개의 바람이 되어★'추모곡 "천의 바람이 되어"는 '하늘문화신문’이 지난 2007년 5월, 작자 불명의 외국 가사에 임긍수 작곡가에게 의뢰한 곡으로 재미 교포 파페라 가수 'Rose Jang'이 노래를 부른 것이다.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이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산 사람을 오히려 위로하고 언제나 곁에서 지키겠다는 위로와 격려의 사랑을 노래하는 곡으로 뜻있는 음악 애호가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추모곡이다. 본지는 이 곡을 세월호 참사로 유명을 달리한 고인들과 유족에게 삼가 바치고자 한다. "내 무덤 앞에서 울지 말아요, 나는 거기에 없어요, 잠들고 있지 않아요, 천의 바람이 되어 저 커다란 하늘을 돌아다니고 있어요, 아침엔 새가 되어 당신을 눈뜨게 하고 밤엔 별이 되어 당신을 지켜보아요, 내 무덤 앞에서 울지 말아요, 거기에 나는 없어요, 죽은 게 아니에요"로 이어 지는 곡은 사별한 연인이 오히려 살아 있는 사람을 위로하고 사랑한다는 내용으로 일본에서는 동일한 가사에 곡을 부쳐 유명 성악가가 부른 곡이 오랫동안 오리콘 차트 1위를 차지한 바 있다. 본지가 제작한 곡은 이와는 완전히 다른 곡으로
‘세월호 참사 회복을 위한 한국교회위원회(위원장 김삼환 목사)’는 1일저녁 7시 서울 강동구 구천면로 명성교회에서 ‘세월호 참사 위로와 회복을 위한 한국교회 연합기도회’를 열었다. 김삼환 목사는 “이번 참사는 희생자와 그 가족뿐 아니라 우리나라 국민 전체의 행복과 미래에 대한 비전을 앗아갔다”면서 “우리가 처한 현실을 깊이 성찰하고 회개하면서 낙망으로부터 회복하자는 뜻에서 기도회를 열었다”고 말했다. 기도회에서는 예장합동 증경총회장 장차남 목사와 전 세계침례교연맹 회장 김장환(극동방송 이사장) 목사가 각각 ‘위로’와 ‘회복’을 주제로 설교했다. 장 목사는 고린도후서 1장 1∼4절을 본문으로 “바울은 핍박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낙심치 않고,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했다”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환난 가운데서 건지심을 믿고, 환난 속에 고통 받고 있는 이웃을 위로하자”고 당부했다. 김 목사는 시편 62편 2∼5절을 예로 들며 “다윗은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아비를 죽이겠다고 하는 암담하고 급박한 상황에서도 묵묵히 주님만을 의지하겠다고 고백했다”며 “우리도 다윗과 같이 인생에서 참으로 의지할 단 한 분, 소망의 하나님만 신뢰하자”고 권면했다. 새에덴교회 소강석
한순간에 꽃다운 생명들이 영원한 세상으로 사라져 버린 것을 보고 우리 모든 산자들은 안타깝고 미안했다. 그리고 유가족들의 가슴 저미는 슬픔에 조금도 함께 하지 못하는 현실에 삶의 의미를 원점부터 다시 돌아 본 세월들이다. 그냥 있을수 만은 없었기에무작정 세월호 참사 진도 현장으로 달려가 자원봉사에 나선 ‘의로운 이웃’이 있다. 보통의 자원봉사가 아니라 희생된 사체를 정성껏 닦고 여미는 시신 수습 봉사에 전념했다. 대학원에서 상‧장례학과 심리학을 전공하고 영남대학교 심리학과에 출강하고 있는 최호선 교수. 그에게서 우리 사회에 오래도록 지울 수 없도록 낙인된 진도현장의 모습과세월호 참사의 트라우마를 진단해 본다. [이하 글은 최호선 교수가 한국일보 김윤곤 기자와 나눈 인터뷰기사를 최호선 교수가 직접 본지에 보내온 것이다. 편집자- 주]● 진도까지는 먼 길입니다. 언제, 왜 그 먼 길을 나섰나요. 가는 길에 스치던 생각은….“저는 여행을 좋아하는 편이라서 전국에 안 가본 곳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진도는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4월 30일 수요일 오전 강의를 마치고 출발했는데 도착하니까 밤이더군요. 돌아올 때는 연휴가 끼어서 9~10시간 가까이 걸린 것 같습니다. 가
기록학 관련 단체들이 세월호 관련 기록을 보존하기 위해 현장에서 ‘기록물 보존 봉사활동’에 나섰다. 한국기록학회와 사단법인 한국국가기록연구원, 투명사회를위한정보공개센터 등으로 구성된 ‘세월호 사고 추모 기록보존 자원봉사단’은 16일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이번 사고와 관련한 각종 기록물 수집에 착수했다. 현장에서 기록 수집을 지휘하고 있는 사단법인 한국국가기록연구원 김익환 원장은 이날 봉사단의 활동에 대해 “세월호와 관련한 사회적 기억을 형성해 고인들을 추모하고, 다시는 이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시민과 정부가 성찰할 내용이 무엇인지 공유하기 위한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김 원장은 “이번 사고는 전쟁에 버금가는 사회현상”이라며 “국민이 체감하는 충격과 이번 사고를 계기로 분출된 사회 구조적 문제를 감안하면 여타 사고와 차원이 다르다”고 덧붙였다.봉사단은 모두 기록 전문가들로 구성됐다. 이들은 6∼9명씩 교대로 실종자 가족들이 머문 진도체육관과 시신안치소가 위치한 팽목항에서 실종자 가족과 희생자 유가족, 자원봉사자들이 남긴 기록물을 수집하고 있다. 이들은 관련 기관과 기록 보존 방안을 논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세월호 기억저장소’도 구
아웅산 폭탄 테러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한 ‘아웅산 순국사절 추모비’ 제막식이 현충일인 6일 오전 미얀마 양곤에서 열렸다. 제막식에는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권철현 추모비 건립위원장, 순국사절 유족 23명 등 60여 명이 참석했다. 미얀마 최대 도시 양곤에 있는 아웅산 국립묘지는 북한이 1983년 10월 9일 당시 전두환 대통령과 수행단을 겨냥해 폭탄 테러를 자행한 곳이다. 전 전 대통령은 화를 면했지만 서석준 부총리와 이범석 외무부 장관 등 대통령 수행단 17명과 미얀마인 7명이 사망하고 50명이 부상했다. 2012년 5월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테러 사건 이후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 미얀마를 방문해 추모비 건립 필요성을 공식 제기했다. 이후 양국 간 논의를 거쳐 지난해 말 추모비 건립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당초 추모비는 지난해 10월 테러 발생 30주기를 맞아 설치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미얀마가 자국 국립묘지에 타국 정부의 추모비 건립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풀지 않아 건립시기가 계속 지연됐다. 아웅산 국립묘지는 일반인에게는 출입과 사진 촬영도 금지할 만큼 엄격하게 관리돼 왔다. 결국 양국이 국립묘지 입구로 건립 위치를 타협하면서 접점을 찾
뉴스를 통해 깊은 슬픔에 빠져 있는 여러분의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희 나라(일본)에서는 3년 전의 거대한 쓰나미로 많은 목숨들이 나뭇잎처럼 쓸려가 사라졌습니다. 어떤 예고도 없는 죽음이었습니다. 지금도 ‘아 그 사람은 이제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이따금 뭐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가슴이 아파옵니다. 어떤 의심도 없이 계속될 것이라 믿었던 일상이 그날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졌습니다. 저의 딸은 학교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의 오카와초등학교 6학년으로 한주만 더 지나면 졸업을 할 예정이었습니다. 학교 앞 길가에 진흙으로 범벅이 된 조그만 주검이 하나하나 놓여 있었습니다. 도저히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집에 있으면 딸이 “이제 왔습니다”라고 말하는 게 들려오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저는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바다를 향해 울며 쓰러지는 여러분들의 영상을 보고 정말로 남의 일 같지 않았습니다. 그런 모습으로 가족을 남겨놓고 먼 여행을 가야 한다는 것. 아마 (아이들은) 무서웠을 것입니다. 차가운 물속에서요. 아이들은 어떤 삶을 살고 싶었을까요.딸을 잃고 3년, 그때도 지금도 지킬 수 있었던 목숨들.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