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결심공판정, 눈물의 호소 줄이어●...
세월호 참사 실종자 10명 가운데 1명인 경기도 안산 단원고 체육교사 고창석(40)씨의 부인 민아무개(36)씨는 21일 법정에 나와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며 시커멓게 타버린 심경을 눈물로 털어놨다. 수학여행을 떠나던 날 새벽, 집을 나서는 남편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못했던 것이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민씨는 이날 광주지법 형사11부(재판장 임정엽) 심리로 열린 세월호 선원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고 교사는 제자들의 탈출을 도우려고 배 안으로 들어갔다가 실종됐다.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주검이 인양돼 사람들이 달려들 때마다 남편이 아니기만을 바랐던 그는 “이젠 남편의 뼛조각이라도 찾아내 어린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민씨는 “너희 아빠 죽었어, 살았어?”라는 친구들의 질문에 고민하던 아이가 “정말 아빠 볼 수 없어요?”라고 물을 때마다 “가슴이 찢어진다”고 했다. 그는 엄마마저 사라질까 두려워하는 9살·7살 아이들이 “(배를) 운전한 아저씨는 어떻게 됐어요?”라고 물었던 일을 이야기하다가 눈물을 터뜨렸다. 그는 “선원들은 지금도 범행을 부인하고 있다. 퇴선명령만 있었다면 많은 사람들이 살 수가 있었다. 세월호와 같은 비극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꼭 진실을 밝혀 달라”고 재판부에 호소했다.
세월호 참사에서 생존한 단원고 2학년 여학생(17)은 재판부에 낸 편지를 통해 친구들을 잃은 슬픔을 힘겹게 털어놨다. 한 학부모가 대신 읽은 학생의 편지엔 “아직까지 가족들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이 학생은 배에서 탈출하기 위해 한 친구와 손을 잡고 바닷물에 뛰어들었던 아픈 상처를 기억해냈다. 하지만 “물살에 휩쓸려 친구의 손을 놓쳤고, 정신을 놓기 직전까지 잠수를 하다가” 바다 위로 나와 “혼자 살아남았다”고 했다. “친구의 손을 놓는 순간과 물속에서 살기 위해 허우적거렸던 순간, 극도로 차오르는 바닷물의 공포, 친구들의 비명과 울음”은 트라우마가 됐다. 학생의 편지를 읽던 이 학부모는 “대학 가서 술도 마셔보고, 결혼식 때 축가도 불러주고, 부부 모임도 해보고, 자녀를 낳아…”라는 대목에 이르자 잠시 읽기를 중단하고 울음을 삼켰다. 이 학생은 “우리의 미래가 어른들의 잘못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고 원망했다. “세월호 사건을 저지른 그들에게 정당한 처벌을 받게 해 살아남은 친구들이 더 이상 세상과 법, 어른들을 미워하지 않게 하고, 친구들에게 미안하지 않게 해 달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숨진 단원고생 전화영양의 어머니는 “딸의 옷과 신발을 챙겨 진도로 내려갔지만 딸은 보이지 않았다. 5일 만에 발견된 딸은 눈도 감지 못했다.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까? 지금도 살아 돌아올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산다”고 말했다. 고 김빛나라양의 동생(16)은 “나무와 하늘을 보면 언니 생각에 너무 괴롭다. 언니가 죽었어야 하는 이유를 알고 싶다”며 “선장과 선원들이 서로 잘못이 없다고 한다는 뉴스를 봤다. 4월16일엔 살기 위해 나왔지만 이제는 어른으로 도덕적인 책임을 지고 말해 달라”고 호소했다. 김양의 말을 듣던 재판장도 1분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고 오준용군의 어머니는 “생일날에 주검으로 돌아온 아들에게 엄마는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했다. 아들의 사망신고도 못하고, 휴대전화도 삭제할 수 없다”며 “우리들의 눈물이 아니라 배에서 학생들이 흘렀을 눈물을 생각해 달라”며 눈물을 쏟았다. 고 이승민군의 어머니는 “아들과 둘이 살았다. 아들이 있어 힘든 줄 모르고 살았다. 그런데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수학여행 길이 됐다”며 선원들을 향해 “그렇게 무서웠습니까? 누가 먼저 나가자고 했나요? 살아나와 지금은 행복하십니까?”라고 물었다.
이날 재판부는 이준석(68) 선장 등 선원 15명에 대한 결심공판(27일)을 앞두고 실종자·희생자 가족 및 생존자 등 13명을 증인으로 불러 재판부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날 법정에선 단원고 2학년 8반 학생의 부모가 만든 영상도 상영됐다. “우린 어른이 되고 싶었지만, 밤하늘 반짝이는 별이 되었습니다”라는 자막 뒤로 아이들의 영정사진과 텅 빈 교실 책상 위에 놓인 장미꽃 등이 흘러나오자 유족들은 오열했다. [한겨레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