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어르신들과 만남에서는 언제나 가슴에 담는 지혜의 말씀으로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기회가 된다. 인생 선배들의 지나가는 진지한 한 마디 말에는 年輪의 무게가 느껴지고 가슴에 남겨지는 것이 있어 매번 다음 만남이 설레이고 기다려지는 마음이 가득하다. 칠십이라는 연수를 처음 살아보는 나로서는 세월에 걸맞는 삶에 대해 숙고하며 나이듦에 따르는 여러가지 변화에 적응해야하는 요소들에 관한 강연을 業으로 하는 관계로 老年이라는 주제는 매우 진중함이 담겨야 하는, 살아 숨쉬는 철학적 고뇌가 뒤따라야만 하는 작업이다. 더우기 癌 투병으로 다양한 장애와 싸우며 지내는 生老病死의 막바지 고개를 넘어가는 현실에서의 화두는 '생의 마지막 모습'과 함께 '죽음과 죽음 이후'의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당면한 주제일 수밖에 없는 지금이기에 그 무게를 혼자 감당하기 부족한 것이 너무 많아 선배들과의 만남마다 깨달음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 누구나 처음 살아보는 인생이고 그 연수일 것이기에 우리는 비틀대고 헤매이는 걸음을 걷게 된다. 삶에서의 빛나는 名譽와 富의 능력을 자랑하며 두려울 것없는 삶을 살아온 사람도 삶의 막바지에서는 예외없이 늙고 병들고 죽기 마련임에도 불구하고 한치 앞
■ 고독사 위험군 약 152만 5000명 지난달 18일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제1차 고독사 예방 기본계획(2023~2027년)’ 내용 중 실태 조사 결과다. 이는 인구 대비 3%, 1인 가구 대비 21.3%가 ‘고독사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2021년에는 3,378명이 고독사한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이는 2017년에 비해 40% 증가한 수치다. 이번에 발표한 ‘제1차 고독사 예방 기본계획’은 “사회적 고립 걱정 없는 촘촘한 연결 사회 조성”을 위해 전체 사망자 100명당 고독사 수 20% 감소와 지역 주도형 고독사 대응체계를 구축하고 근거 기반의 고독사 예방 정책 추진을 목표로 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보건복지부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여기서는 이번 기본계획이 갖는 의미를 톺아보고자 한다. ➡️사회적 고립과 연결사회 조성도 국가의 책무 ➡️삶의 문제뿐 아니라 죽음 문제도 국가의 책무 ➡️신청주의를 넘어 적극적 발굴이 국가의 책무 ■사회적 고립과 연결사회 조성도 국가의 책무 사회적 고립과 단절의 발생 원인은 다층적이다. 가구와 가족 형태의 변화, 가족 구성원의 변화, 사회문화적 요인 등이 복잡하게 서로 영향을 미친다.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나중인지 어떻게 해야할지 당황스럽기만할 뿐이다. 그것은 경험하지 못하고 준비하지 못한 황당함에 일어나는 당연한 현상이다. 그것은 현실성과 사회성의 다른 상황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사회이고 관계자들이 정해놓은 규칙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된다는 편리성과 합리성을 규정해 놓은 규칙이다. 장례의 풍습은 나라와 국민성 이념과 자연의 환경 등을 통하여 발전되고 정립되어 왔다. 특히 동양권의 우리나라는 유교적 풍습과 불교적 습성이 강한 것은 불교가 약 300년 정도에 들어오면서 유교와 불교의 오랜 역사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종교 중 천주교는 약 400년이 넘었다. 기독교는 약 130년이 조금 넘는다. 관혼상제 중 상례를 가장 중요시 했던 이유는 살아서 하는 의식인 관례와 혼례는 부족하면 다른것으로 대안을 세울 수 있고 제례는 형편이 어려우면 간소하게 하고 여유가 있을 때 풍족히 하면된다. 하지만 상례는 삶속에 마지막이며 평생의 단 한번뿐인 의식이다. 관례를 잘못하면 혼례 잘 하면 되고 혼례 잘못하면 기념일 잘하면 되고 살면서 할수 있는 기회가 많다. 상례는 다시 할수 없는 생의 마지막 의식이다. 잘못하면 평생 후회하며 살아
나는 누구인가? 황혼이 찾아오면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 보는 이야기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기에 어디로 가는가. 열심히 살아 왔는데 인생을 회고하며 삶을 돌아본다. 가지고 갈것도 없는데 많은 욕심으로 남의 것을 내것으로 만들려고 그렇게 아귀다툼을 하며 살아 왔다. 현실은 인정보다 경쟁이라는 전쟁을 치루며 살아간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결국 눈뜬 소경이며 듣는 귀머거리가 되어 있다. 보인다고 다 보는 것이 아니며 듣는다고 다 진실이 아닌것 처럼, 인간의 삶을 가장 먼저 생각하고 살아야 함에도 인간은 간곳이 없고 돈을 좇고 돈의 역활에 자기 자신을 팔아 먹는 슬픈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인간의 삶은 한시적 삶이다. 어찌보면 기회의 시간 어찌보면 시험의 무대인 것이다. 살면서 모아논 모든 것들은 남겨진 자의 몫이다. 가지고 갈 것은 그 사람이 살아온 과거의 삶을 가지고 간다. 좋은 것은 좋은 결과를 나쁜것은 나쁜 결과를 결국 심판이란 살아온 삶을 심판 받는다는 것이다. 죄악을 지은자는 죄의 벌로 선함을 행한자는 선함의 보상이 따른다고 종교를 떠나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현실은 돈을 믿고 돈을 좇는다. 돈이 주는 보편적 가치보다 특별한
<고인의 존엄과 존중 보장이 가장 중요한 원칙> 영국 지방정부는 관할지역에서 사망한 무연고자의 장례를 준비할 책임이 있다. 이는 영국의 「공중 보건(질병 통제)법 1984(Public Health (Control of Disease) Act 1984)」에 따라 부과된 지방정부의 책무이다. 영국에서는 사망하고 가까운 친척이 없거나, 가까운 친척·혈족 또는 친구가 장례식을 할 수 없는 경우 또는 이들이 장례 할 의사가 없다면 고인을 위해 ‘공중 보건 장례’(Public health funerals)를 지원한다. 영국의 주택·지역사회·지방정부부(Ministry for Housing, Communities and Local Government, MHCLG)는 ‘공중 보건 장례’의 모범 사례 지침(Public health funerals: good practice guidance)을 제공하고 있다. 이 지침을 통해 영국의 무연고 사망자 장례가 어떠한 원칙에 따라 지원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다. 고인의 존엄(dignity)과 존중(respect) 보장 원칙 영국의 지방정부는 ‘공중 보건 장례’를 지원할 때 장례에 관한 종교나 신념과 관련된 생전의사, 또는…
질병관리청은 지난달 25일 코로나19를 제2급 감염병으로 하향 조정했다. 그리고 이번 달 2일부터는 실외 마스크 착용 의무도 완화했다. 이렇게 코로나로 인해 잃어버렸던 일상이 단계적으로 회복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일상의 단계적 회복 조치들이 지난 2년 동안 코로나가 남긴 사회적 상흔을 저절로 사라지게 할 것 같지는 않다. 코로나 상황에서의 ‘사회적 거리두기’는 일자리의 불안정성을 증가시키면서 사람들의 관계도 단절시켰다. 이러한 단절은 가족관계뿐 아니라 이웃 관계마저도 소원해지게 했다. 이에 따라 홀로 고립된 채 살아가는 삶의 방식 자체가 더 확대되었다. 현재 사회적 고립이 고독사 등의 사회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코로나가 초래한 단절과 고립은 향후 고독사와 무연고사망자 증가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서울시 공영장례지원 상담센터’ 에는 지난해부터 최근까지 언론사 기자들에게 자주 듣는 질문이 있다. “코로나19가 무연고사망자를 증가시켰나요?” 취재하는 기자 입장에서는 코로나19로 고립과 단절이 심화하였으니 무연고사망자 발생도 자연스럽게 증가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하게 된다. 결국 이 질문에는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코로나가 무연고 사망자에게 준 상처는 죽음이 아닙니다. 자극적인 언론의 보도, 차가운 자본의 논리, 사람들의 편견, 애도받을 권리의 박탈입니다. 완연하게 피어난 봄을 맞이하며 더는 무연고 사망자의 존엄을 상처 입히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자신을 위해 어떠한 변명도, 변호도 할 수 없습니다. 죽은 자의 존엄함을 지켜주는 것은 결국 산 자들의 몫입니다. 코로나는 장례식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코로나 사망자의 장례절차는 그 동안 ‘선화장 후장례’가 원칙이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방역지침이 바뀌면서 장례를 모두 치르고 화장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원칙에서 무연고 사망자는 예외입니다. 아직 뚜렷하고 명확한 업무 프로세스가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화장 후 따로 날을 잡아 뒤늦게 장례식을 치르고 있는 상황입니다. 안치실 이용 자격: 가족, 3일장 최근 서울시 공영장례지원 상담센터에 안치실에 대한 상담요청이 늘고 있습니다. 요양병원, 동주민센터, 경찰 모두가 안치실을 구하지 못해 힘들어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여러 충격적인 상황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안치실을 구하지 못한 경찰이 변사자를 무연고 시신이라 주장
'이것'과 '저것'으로 구분되는 무연고 사망자 시신 무연고 사망자의 장례를 치르다보면 종종 듣게 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것’과 ‘저것’ 입니다. 운구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때로는 의전업체의 직원들이 고인이 모셔진 관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지칭하는 말입니다. 사람은 물건이 아닙니다. 아마 가족들이 치르는 일반적인 장례였다면 제대로 된 존칭으로 지칭했을 것입니다. 코로나 탓에 자원봉사자 모집이 불가능한 요즘, 이 문제는 특히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운구를 위한 최소한의 인력이 갖춰지지 않다보니 의전업체 직원들은 현장에서 다른 운구 기사들을 섭외해야 합니다. “불쌍한 사람이고 좋은 일이니까 도와줘야지”라며 함께 관을 드는 분들에게 고마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들을 움직인 시혜와 동정이 고인을 빨리 ‘처리’해야 하는 짐짝으로 만들 때 깊은 아쉬움을 느낍니다. 서울시는 다른 지자체에 비해 좀 더 안정적이고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공영장례’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아직 보완해야할 점이 많긴 하지만 그래도 근간이 되는 시스템은 갖춰진 셈입니다. 하지만 제도를 만든다고 해서 ‘존엄한 삶의 마무리’가 바로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도를 따라 시민들의 인식과 의식이 바뀌는…
서울시에서만 무연고 사망자 천명, 이제는 대비해야할 때 무연고 사망자의 전국 통계가 매년 증가하면서, 서울시의 통계도 마찬가지로 매년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2020년에는 서울시에서만 한 해에 665명의 무연고 사망자 장례를 치러야 했고, 2021년에는 856명의 무연고 사망자 장례를 치렀습니다. 1년 만에 거의 200명가량 증가한 셈입니다. 그러다 보니 현장의 부담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한 해 동안 386명의 장례를 치렀던 2019년과 비교했을 때 인력과 공간에 변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무연고 사망자의 수가 두 배 이상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전업체의 인력은 두 사람입니다. 공영장례가 안정적으로 안착하며 자연스레 늘어난 장례 참여자들, 무연고 사망자의 지인들과 연고자를 위한 공간도 예전 모습 그대로입니다. 이제는 비좁게 느껴지는 빈소 탓에 사회적 거리두기도 어렵고, 때로는 참여자들이 교대로 빈소에 들어와 애도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아주 중요한 것을 놓치는 일이 생기고 있다는 점입니다. 서울시 공영장례지원 상담센터는 부고 안내를 놓치는 일이 생겼습니다. 1년 동안 856명의 부고를 세 사람이 챙기다 보니 예전과는 다르
죽는다는 것이 세상의 고통과 슬픔의 모든 문제들을 던져버리고 훌쩍 여행 떠나듯 다른 세상으로 갈 수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획 떠나는 것이 아니라 살면서 행한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정리하고 계산 해야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과정은 자신의 삶을 빠짐없이 리뷰해야 하는 절차를 거쳐야만 하는 것으로 까맣게 잊고 있던 찰라의 순간까지 빠짐없이 찾아내어 적나라한 화면으로 온 하늘을 다채우며 보여준다. 믿거나 말거나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겪은 나의 체험기이다, 이상하고 별난 사람으로 바라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조차 전해져야 할 인연이 되어 밝힐 마음을 내어본다. 온갖 요상한 말로 저마다 진실인양 떠드는 혼란스런 세상이고 내키지 않을 주제이지만 절대 예외가 없이 당해야만 하는 일이니 기억했으면 좋겠다. 청소년기에 죽음을 경험했던 나의 이야기는 한때 세상에 화제거리로 잠시 알려진 적이 있다. 죽음은 예기치 못한 때에 한순간에 찾아와 눈돌릴 틈도 주지 않는다. 후에 겪을 일을 생각해서 지울 것은 지우고 다듬고 좋은 것으로 포장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한치의 오차없이 날것으로 살아온 숨소리까지 다시 보여주며 자신의 과오를 처절
중장년기는 청년기에서 노년기로 넘어가는 중간시기로, 태어나서 청년기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경험을 통하여 습득된 삶의 연륜과 지혜가 무르익은 시기이며, 이후 노년기의 삶의 질이 결정되는 중요한 시기이다. 중장년기에는 가정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안정적인 위치에 있기도 하지만, 불안정하고 어렵기도 하는 등 개인에 따라 편차가 매우 크다. 또한 일반적으로 경제활동 참여율이 높고, 가족 중심적·독립적 자립 의식이 강하며, 사회공헌에 참여 의사는 높으나 실제 참여율은 저조한 세대이다. 대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 소유자 및 전문 사무직에 종사하는 고학력 전문집단의 수가 점차 증가하고 있다는 일반적인 특성이 있어 이에 따른 맞춤형 지원이 요구되는 세대이기도 하다. 이러한 중장년기 세대에 대한 지원정책은 2010년을 기점으로 변화하였다. 2010년 이전에는 만 65세 이상 노인복지 중심의 정책 및 사업을 추진하였다면 이후에는 베이비붐 세대의 대량 퇴직으로 인해 이들의 노후 준비, 사회활동이 저출산 고령사회 문제와 맞물려 검토되기 시작하면서 중장년 세대 일자리, 노후, 문화, 교육 등의 영역에서 구체적인 지원사업을 부처별 혹은 관계부처 합동으로 추진하였다. 2016년 ‘저출산
지금은 변화의 시대입니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국가든 변화에 적응하는 경우는 번영을 이룰 것이요, 그렇지 못할 경우는 쇠락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북두칠성 시대에서 은하수 시대로의 변화가 도래했습니다. 북두칠성 시대에는 하나의 목표를 향하여 모두가 줄을 서서 달리는 시대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1등에서 꼴찌까지 등급이 매겨지기 마련입니다. 1등이 있는가 하면 꼴찌도 있게 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은하수 시대에는 제각기 자기 방향으로 달리기에 등수가 별 의미가 없게 됩니다. 제각기 자기 방향으로 달리기에 100명이 달리면 1등이 100명이 나오게 됩니다. 이른바 개성이 존중되고 자기 나름으로의 창의력과 상상력이 중요하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등수가 중요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등수가 아니라 개개인의 독창성과 자기실현이 중요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실에서 성적은 꼴찌를 하여도 자신의 개성을 발휘함에 두드러지게 되면 자기 분야에서는 1등이 되게 됩니다. 그래서 개개인의 개성이 존중되고 창의력과 상상력이 중요하게 됩니다. 이런 시대의 변화를 일컬어 4차 산업 혁명 시대라 부릅니다. 지난 3차 산업 혁명 시대에는 자본이 중요하고 기술이 중요하고 성적순이 중요하였습니다. 그
국제적으로 COVID-19로 불리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일상을 박탈당한지 1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처음에는 외국에서 발생한 사소하지만 안타까운 일로만 보였고, 다른 많은 전염병들처럼 우리가 접할 수 없는 곳에서 그 발걸음이 멈추고 말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 모두 곁에 다가온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단지 집합금지명령 때문만이 아니라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무증상 감염으로 가족끼리도 만나는 것이 불안한 시대가 되고 말았다. 혹자는 현 코로나 바이러스의 세계적 유행 상황을 스페인 독감과 비교하기도 하지만 현재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영향은 인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전염병이었던 중세시대 예르시니아 페스티스(Yersinia pestis), 일명 흑사병에 비견할 만하다. 온 세상에 흑사병의 손길이 한번 뻗치자 그 이후 인류의 삶은 수백 년 동안 그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되었고, 그 이전과는 다른 세상이 열리게 되었다. 제2차 대전을 제외하고 인류에게 가장 참혹했던 중세 흑사병의 발자취를 따라간 ‘흑사병 시대의 재구성’이란 책에서 저자는 현재를 살아가는 인류에게 큰 경종을 울리고 있다. 몽골 고원 내지는 이시크쿨 호수 근방에서 발생해 유라시아…
세상에 영원힌 것은 없다는 불변의 명제는 어느 누구나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살다보니 암환자가 되어 투병중에 있지만 나 자신은 오래 전부터 공부해왔던 인문학 강의를 통해서 대중들에게 이야기했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정작 가족들에게는 제대로 진지하게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대장암으로 몸져 누운 와상환자의 입장이 되어보니 죽음이라는 단어를 현실적으로 보다 가까이 접하고 차분하게 죽음에 관한 보다 깊은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향해 살고 있으며, 죽음을 가까이 함께하는 삶을 사는 것이 보다 삶의 의미를 진하게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할것이다. 나는 청소년기에 사고로 사망선고를 받고 영안실에서 다시 깨어났던 경험이 있다. 이러한 경험은 TV를 비롯해서 다양한 매체를 통해 여러번 전파된 바가 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많은 이들에게 죽음 이후의 삶과 삶의 방법에 대한 강의를 하는 것으로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십여 년전부터는 죽음 이후 장례문제에 대한 강의와 저술활동을 해욌다. 많은 문제가 우리의 장례식 장면에서 보여지고 달라진 현대의 생활패턴과 의식수준이 예전과 다름을 간과하고 비지니스가 개입된 왜곡이 많음을
죽음에 대한 사유는 인간 존재가 탄생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규정되지 않는 죽음의 실체는 인간에게 불안 그 자체이다. 시대의 흐름 안에서 고대와 중세에는 주로 전쟁과 기근, 자연재해가 죽음의 주된 유형이었다면, 근대에는 암과 같은 난치병, 교통사고 등이 죽음의 주요 유형이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과학과 의학의 눈부신 발전에 힘입어 이전까지 크게 논의되지 않았던 안락사, 낙태, 뇌사 등이 죽음의 새로운 유형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현재 ‘코로나바이러스19’가 선사한 새로운 차원의 죽음을 마주하고 있다. 물론 전염성 감염병(communicable infectious disease)은 현시대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서구사회는 이미 14세기 중엽에 유럽 전역을 휩쓸었던 페스트를 경험했으며, 그 당시 유럽 인구의 약 1/3이 사망했을 정도였다. 20세기에는 1918~1919년 스페인 독감, 2009~2010년 신종인플루엔자가 3차까지 진행을 겪었던 것처럼 우리는 현재 코로나19 제2차 팬데믹을 맞이하고 있다. 2019년 12월 초, 중국 우한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코로나19 대규모 전염성 감염병은 2020년 4월 사망자가 속출하면서 전 세계 장례 절차는 존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