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사유는 인간 존재가 탄생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규정되지 않는 죽음의 실체는 인간에게 불안 그 자체이다. 시대의 흐름 안에서 고대와 중세에는 주로 전쟁과 기근, 자연재해가 죽음의 주된 유형이었다면, 근대에는 암과 같은 난치병, 교통사고 등이 죽음의 주요 유형이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과학과 의학의 눈부신 발전에 힘입어 이전까지 크게 논의되지 않았던 안락사, 낙태, 뇌사 등이 죽음의 새로운 유형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현재 ‘코로나바이러스19’가 선사한 새로운 차원의 죽음을 마주하고 있다. 물론 전염성 감염병(communicable infectious disease)은 현시대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서구사회는 이미 14세기 중엽에 유럽 전역을 휩쓸었던 페스트를 경험했으며, 그 당시 유럽 인구의 약 1/3이 사망했을 정도였다. 20세기에는 1918~1919년 스페인 독감, 2009~2010년 신종인플루엔자가 3차까지 진행을 겪었던 것처럼 우리는 현재 코로나19 제2차 팬데믹을 맞이하고 있다. 2019년 12월 초, 중국 우한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코로나19 대규모 전염성 감염병은 2020년 4월 사망자가 속출하면서 전 세계 장례 절차는 존엄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것이 병마와의 싸움이다. 노화로 인한 변화가 자연스러운 것이기는 하지만 표면화된 질병으로 인한 전후의 변화는 존재감의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노년의 건강한 삶에 대한 숱한 강의를 해오던 필자도 실제 체험을 통한 현실에 충격이 적지 않다. 필자는 지난 5월에 대장암 4기 진단을 받고 10월에 수술을 하고 현재 항암치료를 받고 있다. 항암이 끝나면 다시 한번의 수술이 남아있는 상태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느끼는 나의 삶은 암 진단을 받기 전과 후로 나뉜다. 활발한 사회생활을 해오던 나로서는 급격한 삶의 변화를 절감하고 있다. 바로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투병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주변의 관계가 서서히 뜸해지다가 사라지고 있음을 실감한다. 동료애를 넘어 형제 운운하던 인간관계마저 희미해지면서 나를 바라보는 가족들의 눈길도 간격을 띄우며 조심스러워하는 것이 보이고 뭔가 부담을 느끼고 있음을 알아채기까지는 불과 몇개월의 시간이 흘렀을 뿐이지만 계절이 바뀐 것처럼 차이가 있다. 암진단 이전의 나라는 존재와 암환자라는 명찰이 붙여진 지금의 존재의 차이는 무엇일까? 주변에 부담을 줄 수밖에 없
인공지능, IT, BT, 생명공학, 초연결사회, 융합이라는 용어들이 인류의 장밋빛 미래를 예언할 것처럼 올해 초까지 회자되고 있었다. 소위 ‘4차 산업혁명’이라는 화두가 언론, 산업 그리고 대학의 담론을 온통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21세기 위생의 개선, 의생명기술의 발전은 인간 수명을 두 번 더 살게 만들었다. 이런 과학기술문명의 성과에 안주하던 인류는 코로나19가 몰고 온 변화 앞에 멈추어 섰다. 그리하여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지역과 세대, 인종과 계층, 사상과 정치체제를 넘어서 공통의 문제를 함께 해결해야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과거에도 인류에 재앙을 준 바이러스 침입이 있었지만 코로나19처럼 국지적이 아닌 전세계적이며 빠른 전파속도를 가진 전염병 재앙은 없었다. 의사소통기술이 발전되지 않았고 글로벌한 경제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 14세기와 19세기의 흑사병 때는 물론이고 양차 세계대전 때도 무풍지대는 존재했으며 역사의 소용돌이 밖에서 일상을 영위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번 코로나19는 성별, 국적, 사회적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전방위적 전염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서 그 추이를 지켜보며 극복방안을 찾고 있다. 21세기 문명이 극복했다고 생
『결론부터 말하면, 어쩌면 현재 한국사회는 이전과 다른, 그러나 보다 다층화된 남성성을 요구하고 있는지 모른다. 기존의 폭력적이고 전통적인 남자다움은 이제 경멸과 비판의 대상이지만, ‘지질함’이나 ‘탈 책임’에 대해서도 누구든 옹호하기 어렵다. 냉전 안보국가와 신자유주의 사회는 그래서 ‘강한 남성성’을 뒷받침하고 여성을 종속적인 지위에 놓는 경향이 있다. 이런 모순을 벗어나기 위해 더 깊고 큰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가정, 직장, 학교 그리고 미디어 공간이 다 변해야 여성도 남성도 해방될 것이다.』 “오륙남은 왜 그럴까” 최근 50-60대 남성을 가리키는 신조어가 또 만들어져 많이 쓰이기 시작했다. ‘오륙남’이다. ‘오십대 육십대 (한국) 남자’라는 의미를 가진 이 단어는, 최근 지하철 같은 공공장소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고 또 이를 지적하는 다른 시민이나 공무원과 시비를 붙어 폭력적 행동을 하는 중년 남성들을 비판하는 언론 기사에서 부각되었다. 이를 보도한 매체의 기사 제목을 보자. 「'지하철 마스크 싸움' 영상 퍼져...또 '오륙남'」 (이데일리, 2020.8.27.) 「"마스크 안쓸란다"…대중교통 최대 독불장군은 '오륙남'」 (뉴시스 2
인생만사 해석이 중요하다 우리들은 평소 나이를 의식하며 살아가지 않는다. 나이를 생각하고 뒤돌아볼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치열하게 앞만 보고 살아 왔다. 아직도 한참 때이고 무엇이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으로 무장하고 살아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눈이 침침해서 글씨가 보이지 않고 주변의 시선이 의식되고 뒤처지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을 수 있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등으로 인해 중년 그리고 장년이라는 우리들의 나이가 ‘벌써 이렇게 되었나’라며 놀랄 수도 있다. 하지만 중장년이 되어 심리적으로 신체적으로 지치고 심한 압박을 경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자신을 챙기고 돌볼만한 여유는 여전히 없다. 오히려 고용은 점점 불안정해지고 자녀들의 독립 시기는 점점 늦어지고 수명은 점점 늘어서 필요한 노후자금은 더욱 늘어나고 지금 상태에서 버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든데 앞으로 더 나빠질 것이라는 예측들은 계속 쏟아지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가정, 직장, 학교, 지역사회를 포함하여 전 세계적으로 이동과 교류가 제한되어 사회가 온통 불안과 우울, 침체로 가득 차 있는 상태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예측을 할 수 없는 불확
-과도한 공직 쏠림 현상? 죽어서도 차별받기 때문. 사병 묘역에 안장된 장군은 누가 있나 봤더니 -조선이나 지금이나 사병을, 국민을 노예로 여겨. 예비역들을 통해서 이런 이슈는 확산되야 한다 –최저임금 못주는 징병 군인들에겐 위안부를 데려간 일본이나, 자신들을 끌고 온 국가는 같은 꼴 한국사회가 과도하게 공직에 쏠리는 이유가 있다. 죽어서도 차별받기 때문이다. 이번 백선엽 장군 건으로 사병 묘역에 안장된 장군이 누가 있나 찾아봤더니 채명신 장군 외에는 그런 사례가 없다. 이런 사회풍토에서 그런 결정을 한 고인의 뜻을 정말 높게 평가한다. 우리는 장군묘와 병사묘 구분을 하는데, 그런 구분은 한국에만 있다. 세계 어디에서도 죽음을 가지고 차별하는 나라는 없다, 그것도 군인을. 국가가 앞장서서 죽음을 차별하고 죽음 이후까지도 계급을 부여하니 군인들이 정치에 목을 멜 수 밖에 없다. 조선조에서 족보로 줄을 세우는 풍경을 보는 듯하다. 장군이나 고위공직자를 한 사람이 조상 중에 있으면 그 사람은 두고두고 족보에 올라가 존경을 받고 대대로 그 누구의 몇 대 손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한다. 나 보수요, 나 장군이요 하는 이들 중에서 부끄럽다며 군복 벗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신간 서적이 있습니다. 『코로나 이후의 세계』란 책입니다. 세계 1위의 미래학자로 인정받고 있는 제이슨 솅커가 쓰고 박성현 번역으로 미디어숲에서 출간한 책입니다. 코로나19, 중국폐렴으로 온 세계가 몸살에 몸살을 앓고 있는 때에 코로나 이후의 세계가 어떻게 변할 것이며 그 변화에 어떻게 적응하여야 할 것인가를 깊이 있게 분석하고 있는 책입니다. 우리나라처럼 별반 자원이 없는 처지에 코로나 같은 강풍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겨레의 사활을 좌우하는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관민상하가 연대하여 지혜롭게 대처하여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삼을 수 있는 슬기로움을 발휘하여야 합니다. 코로나 사태가 가져오는 부정적인 폐해에 대하여는 새삼스레 논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나는 이번 사태가 가져오는 긍정적인 면을 생각하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이번 사태로 인류가 많이 겸손하여지고 있습니다. 큰 나라도 작은 나라도 힘센 나라도 힘없는 나라도 자신들의 한계를 느끼고 많이 겸손해졌습니다. 두 번째는 모두가 가정적이 되고 가족의 소중함을 피부로 느끼게 된 점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술자리도 줄어들고 모임들도 취소되면서
혈연과 제도를 넘어 동행의 관계로 가기 위한 ‘가족 대신 장례’ 그 첫걸음이 시작되었다. 그동안은 혈연관계와 법적 관계가 서류로 제시되지 않으면 삶의 동반자였던 사람이 장례를 치를 방법이 없었다. 평생을 함께 살아온 사실혼 관계의 배우자도, 심지어는 유언장으로 살아생전 공증을 받아 두었던 친구마저도 예외는 아니었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서울시 무연고 공영장례에 참여한 사실혼 관계의 남편은 “내 아내는 무연고사망자가 아닙니다.”라며 울분을 토하고, 또 다른 분은 “처벌을 받아도 좋으니 내가 할 수 있게 해 달라” 며 간청하기도 했다. 2015년 이후 서울시 무연고 장례를 지원해 온 사단법인 나눔과나눔은 이러한 장례 제도의 문제점과 실태, 그리고 제대로 애도할 수 없었던 당사자의 목소리와 사례를 다양한 언론 매체를 통해 알려왔다. 특히 지난해 9월에는 화우공익재단과 함께 가족 대신 장례의 법적·제도적 개선을 위해 ‘사후자기결정권 국제심포지엄’ 을 개최하기도 했다. 이러한 결과들이 모여 11월에는 보건복지부가 무연고사망자의 장례를 동거인과 친구 등이 치를 수 있도록 장례 제도를 개선하겠다고 발표했다. 그 후속 조치의 하나로 보건복지부는 ‘2020년 장사 업무 안내
-경제활동 인구 50%만 가입. 한 푼 아쉬운 특수고용, 자영업자들에게도 보험료 내게 할 것인가 -개인사업자, 자영업자는 실업 수당을 위해 조금만 어려워지면 폐업 또는 계약해지할 공산 커져 -근로자가 고용 유사한 보호를 받는다면 기업은 고용보다 개인사업자와의 계약관계로 유도할 것 위기를 겪으면서 사회보장과 복지의 확대요구가 커지고, 아니나 다를까 여권이 군불을 피워대고 있다. 공유경제 등 특수 고용이 높으니 그들의 보호를 높여야 한다는 주장은 약자 보호를 위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모든 규제는 이처럼 표면적으로 그럴싸한 선의로 시작한다. 우선 미국의 캘리포니아가 우버 등의 특수고용(계약관계의 개인 사업자)을 근로자로 보고 그에 준하는 보호와 수당 등을 제공하라는 규제를 가했다. 결과는 그런 고용의 축소로 이어지고 있다. 계약(고용)의 비용을 높이면 고용의 수요가 줄어든다는 너무 상식적인 경제학적 진리를 무시하는 정책들이 종종 가져오는 문제점이고 문재인 정부의 소주성이 여실히 재증명한 사실이다. 온국민 고용보험을 제시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나라의 경제활동 인구의 50%만이 현재의 고용보험에 가입해 있다. 나머지 50%를 보험제도의 보호 하에 두겠다는
서울역에서 도로를 건너면 높은 건물들 사이 여인숙과 쪽방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동네가 있습니다. 동자동쪽방촌은 주민들 스스로가 사랑방마을주민협동회를 조직하여 열악한 주거환경 개선과 반찬 나눔, 의료서비스 등의 지원을 모색하며 이웃들끼리 나눔의 문화를 만들어왔습니다. 나눔과나눔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거주민들 중 무연고자가 되어 돌아가시는 분이 있을 때 함께 장례를 치러왔습니다. 그러던 지난 3월 중순 SNS에서 동자동사랑방의 유○○ 이사장의 사망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지난 몇 년간 장례 등을 통해 뵈었던 이사장님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사망소식은 황망하기만 했습니다. 연고자로 형제들이 있었지만 시신인수를 거부하는 상황이라 장례가 언제 확정될지 알 수 없어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사랑방 활동가들은 형제분들에게 여러 차례 전화를 걸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흘러 지난 4월 초 유 이사장의 장례일정이 확정되었고, 화장일에 앞서 동자동에서 추모제가 열렸습니다. 1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추모식에 조문을 왔고, 각자의 추억들을 가지고 유 이사장을 애도했습니다. 유 이사장은 생전에 아픈 주민들을 병원으로
한데 모여 살아가는 우리들은 무엇으로 연결되어 있을까, 어쩌다 각자의 이해득실에 따라 모였을 뿐일까, 그럼에도 공동체를 지속가능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끈이 있지 않을까… 전 세계가 코로나의 팬데믹에 휩싸여 있는 때에 이러한 질문을 더 골똘히 하게 된다. 마스크 너머의 불안한 눈빛, 안타깝게도 너무나 친숙한 말이 되어 버린 사회적 거리두기, 대공황 이후 최악이 될 것이라는 경기침체 전망까지 우리가 어떻게든 이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아니, 깨달음이라는 표현보다 쏟아지는 정보와 노심초사 속에 멀미가 날 지경이다. 전염병은 전쟁과 더불어 우리가 불가분으로 얽혀있음을 체감하도록 내모는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다. 게다가 전염병은 적과 친구를 구분하지 않고 사방에서 조여오기에 더욱 두려운 측면이 있다. 마치 캄캄한 어둠 속을 헤매는 카메라 앵글을 따라갈 때의 그 막연함과 공포처럼. 무서운 전염성 탓에 부지불식간 피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될 수 있는 현실 앞에 무기력해지기도 한다. 그야말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공포(fears of all against all).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한국 사회는 적극적인 거리두기를 실천하면서 되레 평소에는 더 살가운 연대의식을
우한 폐렴으로 인하여 모두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이제는 온 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어 세계의 근심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 내가 등산길에서 만난 한 자매님이 우한 폐렴이 좋은 점들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물론 정말 좋다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그나마 좋은 점도 있다는 자조(自助) 섞인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첫째는 코로나19로 인하여 인간이 평등함을 깨닫게 되어 좋다 하였습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서민들만 걸리는 병이 아니요, 돈 없고 신분이 낮은 사람들만 걸리는 병이 아니라 한 나라의 수상도 걸리고 장관도 걸리고 돈 많은 사람도 차별 없이 걸리는 병이어서 코로나19 앞에서는 인간이 평등함을 깨닫게 해 주어서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가정을 소중히 할 수 있게 하여 좋다는 것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술집도 문을 닫게 되고 사회적인 교제도 멈추게 되어 직장 일 마치고 곧바로 가정으로 들어와 가족들과 함께 지나며 가정을 지키게 되니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번 전염병이 끝난 후에도 가정을 소중히 하는 점은 계속 이어나가게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셋째는 인생살이에 무엇이 가장 소중한지를 깨닫게 해 주어 좋다는 것입니다
일부 한국 언론의 구태의연한 조선족 비하 추태로 쌓인 불감증 때문인지는 몰라도 가끔 SNS에 뜨는 한국인의 연변(조선족) 덕담 동영상을 시큰둥하게 대해왔던 필자였다. 연변의 어느 으슥한 골목가게에서 양꼬치, 순두부, 온면 맛에 완전히 넋을 빼앗긴 한국 ‘미식가’ 백종원씨의 동영상을 봤던 적이 있다. “감동이다, 감동! 어― 좋아라”를 연발하며 연변음식에 몰입하는 백씨의 동영상에 조선족 네티즌들은 의외로 민망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대표적인 멋진 음식점을 놔두고 하필 초라한 골목가게를 고른 프로그람 PD의 저의를 꼬집은 것이다. 물론 프로그람 취지에 대한 해명이 뒤따랐지만 ‘초라한 골목가게’가 일부 한국 언론의 빈축거리로 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 비롯된 불편한 심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네티즌들의 민감한 반응에 필자 또한 공감되는 바가 없지 않다. 조선족사회가 이성화돼가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대목이었다. 그런데 일전에 SNS에서 만난 ‘연변덕담타령’은 필자를 사로잡았다. 덕담내용이 날카로와서였는지 아니면 덕담을 펼치는 한국 젊은이의 느긋한 자세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순수함이 몸에 배여있는 조선족에 비기면 한국인은 싸가지가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노년만큼 행복한 연령대는 없다.” 이는 많은 사회학자와 심리학자들의 연구결과이다. 절대적인 빈곤과 건강에 심각한 장애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노년엔 매인 데가 없고 책임과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 정신적으로 편안하기 마련이다. 남과 경쟁할 필요가 없고 부의 증가와 사회적인 위상을 위한 노력에서 자유롭다. 자기 생활을 자기가 결정할 수 있다. 그래서 노년이야 말로 유유자적(悠悠自適)한 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년의 삶이 고달프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크게 마음가짐과 식생활 그리고 적절한 운동을 꼽고 있다. 최근 선진국에서 예방의학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 이유다. 국제 의학 학술지에 비쳐진 100세 시대를 위한 건강관리법을 요약해 본다. 마음가짐 마음가짐은 건강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미국 U.C. 샌디에이고 의대 건강노화센터 제스테(Dilip Jeste)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긍정적이고 가족 간 끈끈한 유대감을 가지면서 신앙심이 깊은 사람에게서 100세 장수자가 많은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90세 이상의 고령자일수록 긍정적이고 가족 간 긴밀한 유대감, 나아가서 돈독한 종교
30대, 이제 나도 누군가가 기댈 언덕인데 1. 자신의 환경이 곧 세계관이 되는 어린 시절 자주 넘어져서 무릎이 깨졌다. 대충 초등학교 저학년까진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거의 무릎에 반창고를 붙이고 있었다. 까진 곳이 또 까지는 바람에 짓무른 적도 여러 번 있다. 하지만 흉터 하나 없이 말끔하게 나았다. 30대가 된 후 느끼는 가장 큰 변화는 몸의 회복력이다. 어릴 때는 무릎 깨져도 내비두면 금방 나았는데 이제는 반창고 붙이고 일주일은 조심해야 딱지가 앉는다. 내 몸에 있는 크고 작은 흉터도 전부 20대 이후에 생긴 것들이다. 나이를 더 먹으면 더 쉽게 다치고 회복력은 더 떨어질 것이다. 반면 어린 아이의 마음은 쉽게 상처받고,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어린 시절 말랑한 마음에 받은 상처는 극복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거나 아예 극복하지 못하기도 한다. 지금이면 의연히 대처하거나 신경쓰지 않을 일도, 어릴 때는 실수를 하거나 밤에 괜히 곰곰이 생각하고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어릴 때는 자라나는 환경이 중요하다. 환경을 방어하는 방법을 모르고, 자신의 환경이 곧 세계관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반면 나이 먹어서는 건강관리가 중요하다. 세계관은 이미 형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