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중 사망한 중국군 유해 36구가 고국으로 돌아갔다. 국방부는 31일 오전 인천공항에서 중국군 유해 인도식 행사를 거행했다. 행사에는 양국 유해송환 대표단과 주요 인사들이 참석했다. 이번에 중국으로 송환된 유해 36구는 국방부가 작년 3월부터 11월까지 발굴해 유전자(DNA)감식을 거쳐 중국군으로 판정됐다. 중국군 유해 송환은 2013년 6월 중국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이 미래 지향적 한·중 관계를 위해 인도주의 차원에서 제안해 추진된 사업이다... 양국은 6·25 전쟁 때 한국에서 사망한 중국군 유해를 해마다 청명절을 앞두고 중국으로 송환하기로 2014년에 합의했다. 청명절은 24절기 중 하나로 동지 후 100일이 되는 날이다. 양력으로 4월 5일 전후인 이날 중국인들은 조상 묘를 참배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지난 2014년 3월 국방부는 중국군 유해 437구를 처음 송환했다. 이어 2015년 3월에는 68구를 추가 송환해 그동안 총 505구가 송환됐다. 국방부는 "중국군 유해 송환을 위한 준비는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양국이 긴밀히 협력하면서 진행됐다"면서 "유해 송환을 통해 과거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고 한중 우호 관계
..안중근 의사 순국 106주기 추모식이 26일 오전 안중근의사기념관 강당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유족인 황은주(외손녀), 안도용(증손자)씨와 안응모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 등을 비롯해 숭모회 회원, 시민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최완근 국가보훈처 차장은 추모사를 통해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는 일제의 부당한 침탈과 우리 민족 혼이 살아 있음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으며, 일제에 고통받는 우리 민족에게 불 같은 독립의지를 심어줬다”고 말했다. 이어 “오늘 이 자리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신 선열들의 뜻을 새기고 국민 통합과 호국 의지를 다지는 뜻깊은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행사는 안중근 의사 약전 봉독, 최후의 유언 낭독, 내빈 추모사, 추모 헌시, 추모 공연, 글짓기대회 수상자 시상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 중국 대련서 안중근 의사 순국 106주기 기념식 거행..교민 등 200여 명 참석 중국 랴오닝(遼寧)성 대련(大連)서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 순국 106주기 기념식이 거행 됐다. 26일 한중친선협회(회장 이세기 전 통일부 장관)에 따르면 안 의사 순국 106주기 기념식은 이날 오전 10시(현지시간) 대련시 여순
안중근 의사가 일제에 의해 순국한 뒤 매장된 곳으로 추정되는 중국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의 야산은 수십 년 동안 곳곳에 암장(暗葬)한 개인분묘로 가득했다. 안 의사 순국일을 하루 앞둔 지난 25일 다롄 뤼순(旅順)구의 뤼순감옥박물관 북쪽 예전 '마잉허우'(馬營後)로 불린 야산을 답사했다. 이곳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추적해온 연구자와 시민단체가 유해 매장 가능성이 크다고 공통으로 지목하는 곳이다. . 야산을 뒤진 끝에 지난 2001년 다롄시문물관리위원회가 옛 뤼순 감옥 묘지터에 세운 비석을 발견했다. 일제는 1907년부터 1945년까지 이 묘지 터에 길이 90~100m, 넓이 1m, 깊이 2m 정도의 도랑을 5개 파서 사형을 집행하거나 옥사한 수감자들의 시신을 매장했다. 일제 패망 이후 방치되던 감옥묘지에 인근 주민들이 개인분묘를 설치하면서 현재 수백여기(基)가 난립했고 상당수는 허물어졌다. 관리의 손길이 닿지 않아 잡초가 무성하고 도랑이 있던 자리엔 나무들이 자라나 원형을 찾기도 힘든 상태이다.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이 소장한 사형보고서는 "당일(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 20분 안중근의 시신을 특별히 감옥에서 제작한 침관(寢棺)에 넣고 흰
계모의 학대 끝에 숨져 야산에 암매장됐던 7살 신원영군의 장례식이 13일 경기도 평택시의 한 장례식장에서 치러졌다. 빈소는 따로 마련되지 않았고, 그를 추모하는 꽃 한송이, 조사 한마디 조차 없었다. 유족과 공재광 평택시장, 지역아동보호센터 관계자 등 20∼30명이 장례식장을 찾아 신 군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붉은 천이 뒤덮인 관은 한눈에 보기에도 어른의 양팔 길이에도 못 미칠 정도로 작았다. 성인 남자 네 명이 관을 들었지만, 숨질 당시 또래보다 키가 작고 체중이 덜 나갔던 탓인지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관이 가벼워 보였다. . 원영 군의 시신은 천안추모공원에서 화장됐다. 장례식장 한편에서 소리없이 흐느끼던 친할머니는 화장장에서 화장로로 향하는 손자의 관을 보자 관을 부둥켜안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친모도 관을 붙잡고 한동안 울음을 멈추지 못해 주위를 더욱 안타깝게 만들었다. 유해는 평택시립추모공원 납골당에 안치됐다. 시 관계자는 "신 군의 누나는 아동보호전문기관 관계자와 함께 심리적 안정을 취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장례를 마치고서 유가족에 대한 지원대책 등을 구체적으로 논의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출처 : 연합뉴스]
지난해 12월 19일 늦은 밤. 경찰서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5일 전 낙상 사고로 의식을 잃고 병원에 입원한 김모(67)씨의 딸 소진(19·가명)이었다. “형사님, 혹시 싸게 운구차를 구할 만한 데 없을까요?”전날 소진이와 김씨의 부인 이모(67)씨는 김씨의 장기를 기증하기로 결심했다.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아버지, 쌓이는 병원비…. 가족에게는 견디기 힘든 짐이었다. 이발사였던 김씨는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수년 전 운영하던 이발소를 폐업하고 일용직을 전전했다. 이씨는 폐지를 줍고 소진이는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함께 하며 가족은 겨우 생계를 이어 갔다고 했다. 김씨 가족과 나의 인연은 지난해 12월 14일 오후 3시쯤 걸려 온 신고 전화로 시작됐다. 서울 지하철 6호선 응암역에 노인이 쓰러져 있다는 신고였다...현장에 도착하니 김씨는 계단에서 굴러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병원으로 옮겼지만 숨만 붙어 있을 뿐 깨어나지는 못했다. 만 하루가 지나 은평구 신사동의 낡은 다세대 주택에 사는 김씨 가족을 찾았다. 모녀는 김씨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김씨를 지키며 모녀는 집에서 싸 온 찬밥으로 끼니를 때웠다. 병원 밥을 신청하는 것도 부
서울 강남구 도산공원 지하에 있던 도산 안창호 선생의 옛 묘비가 43년 만에 원래 위치인 중랑구 망우리공원으로 돌아왔다. 26일 한국내셔널트러스트와 서울시설공단 등에 따르면 도산공원의 '도산안창호기념관'에 있던 이 묘비는2월 24일 망우리공원 '도산 묘터'로 옮겨졌다. 1973년 안 선생의 묘가 도산공원으로 이전하며 새 묘비가 세워졌고, 이 옛 묘비는 그동안 도산기념관 지하에 보관돼왔다. 1955년 세워진 이 묘비의 비문은 안 선생 지인인 소설가 춘원 이광수가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글씨는 서예가 소전 손재형·원곡 김기승이 썼다. 앞면에는 한자로 '배우고 가르침에 끊임없이 애쓰시고 슬기와 큰 덕을 바로 세워 사심은 우리나라와 겨레를 위함이셨네. 바르고 사심 없이 사람을 대함에 봄바람 같고 일을 행하심에 가을 서릿발 같으셨네'라고 썼다. 뒷면에는 안 선생의 이력이 빼곡히 적혔다. 안 선생의 옛 묘비 이전은 망우리공원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높이기 위한 프로젝트의 하나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서울시 용역으로 2014년부터 망우리공원에서 역사·문화를 교육하는 '인문학 길'을 조성하는 사업을 해왔다. 망우리공원 묘지는 1938년 세상을 뜬 안 선생이 유언으로 정한
6·25전쟁 당시 전사한 중국군영가를 위로하는 천도재가 10일 오후 3시 경기도 파주 ‘적군묘지’에서 봉행됐다. 한․중평화우호협의회, 한․중불교문화협의회, 불교인권위원회 등은 이날 파주 적성에 위치한 적군묘지로 알려진 중국군전사자 묘역에서 영가천도재를 봉행했다고 11일 알렸다. 불교인권위 등은 천도재에 앞서 북한군 묘역과 중국군 묘역을 둘러봤다. 이들은 정치적 이념을 떠나 영혼천도의식을 통해 전사자들의 넋을 기리고, 또한 한국과 중국의 지속적인 평화, 문화, 인권연대를 위해 자비와 평화의 제단을 만들자고 결의했다. 6·25전쟁 당시 한국군과 유엔군 등 17만 6,000명, 북한군과 중국군은 무려 36만명이 서로의 총탄에 의해 희생됐다. ‘적군묘지’는 전사한 적군이라도 묘지를 조성, 존중해야 한다는 제네바협정에 따라 1996년 7월 조성됐다. 우리 정부는 전국에 산재한 북한군 유해 648기와 중국군 유해 505기를 모아 안치했다. 지난 2013년 6월 박근혜 대통령이 방중 때 중국 측에 송환을 제안해 중국이 받아들임으로 인해 유해 일부가 인도됐다. 진관 스님(불교인권위)은 ‘중국군전사자를 위한 위령시’를 통해 “우리는 당신들을 위해 부처님 이름으로 고향으로 돌
열아홉살 김유나씨는 지난 1월 21일 미국 애리조나에서 등굣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뇌사 판정을 받은 그녀는 전 세계 27명에게 장기를 기증하고 세상을 떠났다. 장기기증을 결정한 것은 김유나씨의 부모님이었다.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김양의 부모 김제박(믿거나말거나박물관 대표)와 이선경씨 부부는 이미 가망이 없다는 소식을 들은 뒤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천주교 신자인 부부는 "장기기증을 통해 다시 태어나게 해주면 유나도 부활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에 장기기증을 결심했고, 유나씨의 장기와 인체조직은 전 세계 27명의 삶을 새롭게 썼다. 아래는 김양의 엄마가 딸에게 쓴 편지 원문이다.도착하고 너를 보니 오열을 안 할 수 없구나. 내가 너 대신 누워있었으면 좋으련만.미국 학교 교장샘 외 여러 샘들, 친구들, 후배들, 미국 교회 지인분들 너를 보러 와서 슬퍼하는 거 보니 그래도 우리 딸 잘 적응해서 지냈구나.사고 전날 아빠가 니랑 카톡했다 하길래 전화할려다가 니가 담날 테스트 2개 본다며 무지 바쁘다길래 전화 안했는데, 사고 당일 시험도 못보고 이렇게 되어 버렸네. 진짜 니가 바뻤나보다. 그 날도 다른 때보다 5분 일찍 서두르다 사고를.유나야. 지금 거의 뇌사 판정을
.매서운 '대한'(大寒) 추위가 엄습한 2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종로3가 모텔촌 뒷골목의 돈의동 쪽방촌은 거주민들이 쪽방에 웅크린 탓인지 인적이 드물어 한기가 더 했다. 사람 한 명 지나가기도 어려울 정도로 좁은 골목에서 마주친 쪽방 주민 이해완(65)씨는 "겨울에 난방을 틀어주지만 오후 6시부터 아침 7시까지뿐이어서 냉기가 가시지 않는다"고 한겨울 쪽방살이의 고충을 털어놨다. 한 쪽방건물 2층 3호실에 사는 전경천(58)씨는 "다들 고령에 몸 쓰는 일을 하는 데다가 술담배를 끊지 못해 건강이 안 좋다보니 겨울을 넘기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면서 "올 겨울만 10명 넘는 쪽방 주민이 숨을 거뒀다"고 말했다. 또 다른 주민 황종구(46)씨는 "쪽방촌 거주민은 갑자기 시신으로 발견돼 뒤처리를 하려 해도 가족과 연락이 닿는 경우가 거의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집을 떠난 지 거의가 10∼30년가량 됐고 술 문제 등으로 갈등을 겪어 가족과 헤어진 경우가 많다 보니 가족이 시신을 수습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이 때문에 무연고자의 장례는 별다른 예식 없이 곧바로 화장되는 직장(直葬)으로 치러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서울시립승화원에 따르면2015년 서울승화원에서 화장된 무연
소방관이 순직할 경우 소방관이 소속된 지자체가 장례비용을 지원할 수 있도록 정부가 기준을 마련했다. 순직 소방관의 장례시 장례위원회와 집행위원회를 두게 하는 등 장례절차를 표준화 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다만 소방관 장례를 '시도청장(葬)'으로 할 지, '소방서장(葬)'으로 할 지 기준은 별도로 마련하지 않고, 시장·도지사가 결정토록 했다. 22일 국민안전처에 따르면 안전처는 최근 이 같은 내용의 '순직 소방공무원 장례지원조례 표준안'을 마련해 내주 전국 시도소방본부에 통보할 예정이다. 지자체별로 제각각인 장례절차의 가이드라인을 세우고, 장례비용 지원의 법적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안전처는 장례지원조례 표준안에 소방관이 순직할 경우 해당 지자체가 장례비용을 지원토록 명문화했다. 안전처 관계자는 "기존에는 사회 이슈가 되면 장례비용을 지원하고 아니면 지원하지 않는 등 기준에 제각각이었다"며 "시도 예산범위 내에서 장례 전반적인 비용을 지원토록 명문화 했다"고 말했다. 다만 장례비용은 △조문객 식사비용 △삼오제 △49제 비용 등을 제외하고 지원토록 했다. 안전처 관계자는 "다른 기관과 비교해보니까 장례비용이 통상 2000~3000만원 정도 드는 것으로 나왔다
복잡한 가족사에 얽힌 부모제사 문제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지는 판결이 나와 앞으로 유사한 케이스의 가족간 분쟁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형제들과 협의가 없었더라면 돌아가신 부모의 유체 및 유골은 제사주재자인 장남에게 소유 및 관리권한이 있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수원지법 민사16부(부장판사 박종학)는 장남 A씨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골을 선산에 모시겠다"며 이복동생들과 납골공원을 상대로 제기한 유골인도 민사소송에서 원고 승소판결했다고 24일 밝혔다. 판결문에 따르면 A씨의 아버지는 재혼하면서 1960년대 중반부터 이복동생들과 함께 생활했으며 7년 전인 2008년 사망했다. 사망당시 A씨 아버지는 기독교식으로 장례를 치뤄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A씨의 이복동생들은 아버지 뜻에 따라 화장 후 유골을 납골공원에 안치했다.아버지의 재혼 때부터 사실상 연락이 단절된 채 지내왔던 A씨는 최근에서야 아버지가 숨졌다는 소식을 듣게됐다. A씨는 아버지 유골을 선산에 모셔야겠다는 생각에 이복동생들을 찾았다. 하지만 이미 납골공원에 유골을 안치한 이복동생들은 A씨의 요구를 거절했다. A씨는 소송에 이르렀고 법원은 A씨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제사주재자는 특별한 사정이 있지
홈리스행동과 (사)나눔은희망과행복 등 44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홈리스추모제 공동기획단은 22일 3시 서울역광장에서 '2015 홈리스 추모제'를 개최했다. 빈곤과 차별, 무관심 속에 죽음을 맞은 노숙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마련한 이날 행사는 올해로 15회째를 맞는다. 공동기획단은 홈리스의 생애기록를 담은 기록집 '생애조각을 모으다'를 배포하고 영상 상영회 등을 개최했다. 홈리스 법률상담과 증명사진 촬영행사, 노숙인의 경험담과 사회제도 등을 주제로 열린 달달토크쇼 등 노숙인의 자립과 시민들의 편견 해소를 위한 마련한 부대 행사에는 50여명의 시민과 노숙인들이 참가했다. 오후 5시부터는 올해 처음 서울역 광장에 마련한 시민추모관에서 홀로 길거리나 쪽방에서 죽음을 맞은 노숙인 47명에 대한 합동 장례식을 올렸다. 장례식에서는 노숙인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시민단체 회원과 시민들이 가져온 목도리와 귀마개가 시민추모관에 모인 47개 위폐에 둘러졌다. 공동기획단은 문화제 행사를 마친 오후 6시쯤부터 시민단체회원과 노숙인 등 100여명과 함께 노숙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서울역 광장과 인근 지하도를 도는 추모 행진을 벌였다.박사라 홈리스행동 상임활동가는 "무연고자 또는 가족
국방부는 서울현충원 2곳에 안치된 무명용사 1천535구 유해를 유해발굴감식단의 임시 안치시설로 옮겨 신원 확인 작업을 벌일 계획이라고 6일 밝혔다. 이는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이들 무명용사 유해 가운데 적군 유해가 포함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국회 등의 지적에 따른 조치이다. 국방부는 이날 "현재 서울현충원의 현충탑과 충혼당에 각각 임시 안치 중인 무명용사 유해 1천535구를 서울현충원 내에 있는 유해발굴감식단의 임시 안치시설인 '국선재'로 옮기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무명용사 유해를 국선재로 옮기는 방안이 확정돼 이전하게 되면 유전자(DNA) 감식 등을 통해 신원을 확인하고, 확인된 유해는 국립묘지로 안장할 방침이라고 국방부는 설명했다. 엄격한 절차를 거치는 신원 확인 과정에서 적군 유해일 가능성이 확실한 유해는 현충원 밖 다른 곳으로 옮길 것으로 알려졌다. 국방부는 2000년부터 시작한 6·25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을 통해 전사자 유해를 발굴하고 있다. 국군 전사자로 추정되지만 군번 등이 없어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유해는 무명용사로 분류해 신원이 확인될 때까지 현충원 2곳에 안치해왔다.
●꽃다발 든 어린이 등 주민 수백명 나와서 작별●영결식을 마친 뒤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운구 행렬은 서울 동작구 상도동 사저로 향했다. 1969년 이후 대통령 재임 시절을 제외하고 줄곧 머물렀던 곳이다. 독재정권 시절에는 고초의 상징이었고 대통령 당선 때는 환희의 공간이었다. 26일 김 전 대통령의 ‘마지막 귀가’를 지켜보기 위해 상도동 주민 70여 명이 사저 근처 골목을 가득 메웠다. 오후 4시 10분경 김 전 대통령의 운구차인 검은색 에쿠스 차량이 사저 앞에 도착했다. 김 전 대통령의 손자이자 장남 은철 씨의 아들인 성민 씨가 두 손으로 고인의 영정을 품에 안은 채 마당으로 들어섰다. 차남 현철 씨 등 유족 20여 명도 성민 씨의 뒤를 따랐다. 손명순 여사는 건강 상태를 고려한 듯 차량에서 내리지 않았다. 자택 현관 계단을 통해 집으로 들어선 성민 씨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안방. 현관 복도 좌측의 안방을 한 바퀴 돈 뒤 김 전 대통령의 영정은 맞은편 식당으로 옮겨졌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김 전 대통령이 손님을 맞이했던 거실. 마지막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서일까. 김 전 대통령의 영정은 1분가량 거실에서 머물렀다. ‘ㄷ’자로 소파가 놓인 이곳 벽면
거산(巨山)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삼우제가 28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유족과 측근, 상도동계 인사 등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현충원 장군 제3묘역 우측 능선에 마련된 김 전 대통령의 묘역은 아직 봉분 모양을 잡고 있는 중이어서 주변이 흙으로 뒤덮여 있었고, 묘역으로 올라가는 길도 합판으로 만들어 놓은 임시 통로였다. 묘역 양옆에는 '가족 일동'과 '국립현충원장 이선근' 명의의 조화가 놓여 있었다. 지난 26일 묘역 앞에 세워졌던 임시 목재 묘비는 이날 삼우제 행사 동안 잠시 치워졌다가 다시 설치됐으며, 내년 1월쯤 김 전 대통령의 생애를 기록한 석재 묘비로 대체될 예정이다. 이날 삼우제는 눈발이 간간이 날리는 가운데 예배 형식으로 30분가량 진행됐다. 김 전 대통령의 부인 손명순 여사와 차남 현철씨, 혜영·혜경·혜숙씨 등 유가족과 친·인척 등이 참석했다. 장남 은철씨는 지난 26일 장례식 때 몸살감기에 걸려 불참했고, 은철씨의 장남이 빈자리를 대신했다. 손 여사는 이날도 휠체어를 타고 참석했으며, 예배가 진행되는 동안 묵묵히 김 전 대통령의 묘역을 바라봤다. 예배를 마치고 현철씨가 "여기가 아버님 묘역이예요. 보이시죠"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