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전국적인 추모열기가 달아오르고 있다. 26일 오전 서울 시청광장에서 열린 추념식에는 시민 2000여명이 참석했다. 안 의사 허묘가 있는 서울 효창공원에선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 등 4개 단체가 주관하는 추모제가 거행됐다. ◇젊은층·인터넷 "안 의사 기리자" 이번 추모열기가 더 뜻깊은 이유는 젊은층의 뜨거운 관심을 이끌어 내고 있다는 점이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홈페이지(www.greatkorean.org)는 접속자가 급증하면서 이날 오전 내내 사이트가 마비되기도 했다. 국내주요 포털사이트에는 `안중근`이 실시간 검색순위 1위에 오르는 가 하면 역사를 잘 모르는 어린 학생들이 안중근에 대한 질문으로 인터넷 게시판이 채워지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인 추모 행사도 줄을 이었다. 배화여고 등 서울시내 10여 개 학교에서는 1만여 명의 학생이 참여한 가운데 안 의사 공적낭독과 헌시낭독, 안의사께 바치는 글, 영상물 상영, 손도장 찍기 등 다양한 추념행사를 진행했다. 부산 을숙도 초등학교에서는 초등학생 1000여명이 안 의사에게 바치는 글짓기 대회를 열었고, 전남 함평 상해임시정부청사 복원터에서는 동상건립 행사가 진행됐다. 경기도 안성시 미리내성지 내 실버타운 마을에서도 안 의사 동상 제막식이 열렸고, 파주출판도시에서는 안 의사의 아명을 딴 응칠교 다리밟기 행사가 개최됐다. 경기 부천 중동신도시 안중근 공원에서는 음악회와 함께 추념식이 열렸다. 해외에서의 추모 열기도 뜨거워 함세웅 신부 등 기념사업회측 관계자 100여명은 중국 뤼순감옥 안에서 조선종교인협의회를 비롯한 북한 측 관계자들과 함께 추도제를 거행했다. 젊은층이 안중근 의사에 매료되는 이유는 오늘날에도 울림을 전하는 안의사의 사상 때문이다. 단순히 일제의 거두를 사살했다는 데 대한 민족주의적 감정보단 동양의 평화를 부르짖는 메시지를 더 알려야 한다는 게 세계시민으로 성장하고 있는 88둥이 세대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대학생 이유리씨(22)는 "외국인 친구가 안중근 의사를 가리켜 `테러리스트 아니냐`고 물은 적이 있어 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는지, 당시 한국의 상황은 어땠고, 안중근 의사의 뜻은 무엇인지 설명한 적이 있다"며 "안 의사의 사상이 시대를 앞서갔던 만큼 그의 사상과 행적을 해외에 올바로 소개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최동용씨(25·대학생)도 "안 의사는 시대를 앞서간 혁명가라고 생각한다"면서 "그의 동양평화론은 이제야 조명을 받고 있지만 그의 사상이 제대로 알려진다면 이제 대학가에서는 체게바라 티셔츠가 아니라 안중근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대학생들이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거사 뿐 아니라 `동양평화론` 사상도 재조명해야 국내외 역사학자들과 안중근 의사의 뜻을 기리는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이번 100주년 순국기념일을 맞아 일어난 안중근 재조명 현상을 잘 이어가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동양평화론`을 주창한 안중근 의사의 심오한 사상이 많이 알려져야한다는 의견이 많다. 올초 안중근 의사의 일생을 다룬 소설 `불멸`을 출간한 작가 이문열씨는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기를 앞두고 한번쯤 안 의사의 일생을 돌아보고 짚어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국민들이 안 의사에 알고 있는 사실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하얼빈역에서의 단 하루뿐"이라고 지적했다. 100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국민들이 그 동안 안 의사에 대해 너무 몰랐다는 것이다. 그는 "안 의사의 행적은 한편으로 우리의 슬픈 역사이자 오늘을 있게 한 밑거름"이라며 "단편적이지 않고 종합적으로 그를 알아가는 것은 현 시대에서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소설 속에서도 "단호하고 자명한 길을 한 번 주저함도 없이 달려간 듯 보이는 그의 불꽃 같은 삶은 우리의 집단 무의식 속에 불멸의 기억으로 타오를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구태훈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이번 추모열기에 대해 "예전까지 단순히 이토 히로부미 저격이라는 단일한 사건의 개인으로 취급해왔다면, 이제 한국 열혈독립운동의 창시자로서, 계승자로서의 공적의미를 부여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며 환영했다. 구 교수는 "안중근 의사는 우리나라 근대화 과정에서 한국을 대표했던 계몽적 지식인이자 사상가이며 학교를 두개나 설립해서 운영했던 교육자"라며 "특히 국채보상운동도 단순 참여가 아니라 사실상 주도하는 역할을 하면서 사회운동가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1909년 당시 의병도 다 토벌되고 만주와 러시아 등지에서 무기를 구하거나 사람을 모으기도 어렵자 소수정예와 개인이 나서는 열혈독립운동을 창시했다"며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의 전략도 바로 안 의사의 독립운동방식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