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에서 피하고 싶은 죽음을 굳이 이야기하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언젠가는 피할 수 없이 죽음을 맞이할 우리가 땅에 묻히는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묻힐 수 있는 삶을 살아야만 한다는 것을 깨우치기 위함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이란 나와는 전혀 상관없을 주제로 다른 사람의 문제로만 여기며 살아가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서로의 가슴에 남겨질 여운을 만들기 보다는 오히려 사랑의 공간을 없애고 증오와 원망으로 가득 채우는 어리석음을 반복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앞서 떠난 이들의 죽음을 떠올려보면 함께 사는 동안 나누었던 따뜻한 사랑과 이해의 그리움보다는 지우고 싶은 애증이 혼재된 상태일 때 더욱 복잡한 후유증을 남긴다.
고령사회로 인한 변화 중에 가장 걱정되는 부분이 가족 구조의 변화이다. 과거의 가족관계는 언제나 따뜻하고 화목한 사랑의 관계로 출발했지만, 최근 들어 가족 구성원의 이해에 따라서 혹은 예상치 못한 여러 변수로 인해 화목이 깨어지고 심할 경우 남보다 못한 적의를 품고 살아가는 등, 가족 해체 현상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으며 인연을 끊고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무연사회(無緣社會)라는 신조어가 실감날 정도로 혼밥, 혼술로 혼자 사는 일인가구가 늘어나면서 사람과의 관계 사이에 높다란 벽이 생겨나는 고독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대부분 노년의 종말기는 질병이 하나하나 몸에 쌓이는 적병(積病)의 시대로 상당기간 와병상태로 지낼 수밖에 없다. 이를 감안할 때에 가족들과의 정서적인 간격이 생겨나고 경제적인 여건이 악화되는 현상의 이면에는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감정적으로 무디어지는 상황이 빈번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고 고령자들의 길고긴 고통의 시간에 지친 심신으로 살가움이 사라지고 미움과 원망으로 서로를 괴롭히는 일이 늘어난다.
따라서 사람이 사람을 가까이하지 못하고 경계하며 소통이 되지 않고 감정의 표현도 거칠어지는 우려스런 상황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좋고 싫음의 표현도, 감사의 표시도 서툴거나 생략되는 것이 당연한 듯이 이루어지고 가까운 가족 간의 소통마저도 간격이 생겨나는 것은 어쩌면 스마트폰의 보급이 일반화되면서 대화가 줄어드는 것도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 수 없이 경험하는 이별의 매 순간은 언제나 특별함으로 기억되기 마련이지만, 사랑하는 사람과의 감정 정리가 되지 않은 이별은 오래도록 자국을 남기고 그 아픔은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떠난 버린 이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것은 어쩌면 사랑일 수도 있지만 한편 원망일 수도 있는 흔적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하지 못했던 사랑과 화해와 용서의 말들을 지금 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나 떠나면 그만이 아니라 남은 사람의 가슴에 앙금을 흉터처럼 안고 힘들어 하지 않도록 살아 있을 때 표현해야 한다.
임종에 임박한 때에는 정작 하고픈 말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 어렵다. 일상에서 소통의 기회를 늘이고 가슴에 멍울이 생기지 않도록 용서와 화해를 청하는 말, 사랑을 표현하는 말을 많이 하는 습관을 갖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헤어지는 연습이 아닐까. 지금 당장 가슴에 상처 주는 말, 못을 박는 말, 부정적인 말을 하고 있지 않은지 살펴보자. 남아 있는 사람들의 가슴에 오래도록 따뜻함으로 살아있도록 애쓰자.
삶의 여정에서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을 모든 것에 축복을 나누자. 떠나는 사람이든 남는 사람이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동안 세상에 끼치는 모든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과와 감사를 습관처럼 할 수 있는 삶이야말로 오래도록 가슴에 살아있게 하는 아름다운 이별이 될 것이다.
마음건강연구소 대표/골든에이지포럼 전문위원 변 성 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