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사라는 말은 옳지 않은 표현입니다. 감성적인 그 단어로는 사회의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고립사라는 표현이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사무국장님의 말은 지금의 상황의 시작과 결과 그대로 함축하고 있었다. 개인이 경제적으로 추락하는 순간 가족 외에는 그 어떤 안전장치도 제공하지 않는 이 나라에서 가족이 없고 돈이 없는 사람은 철저하게 고립된다. 고독은 가을에 코트깃을 올릴 때나 어울릴 단어이다.
60이후의 삶을 잉여로 취급하는 대한민국이지만 엄연히 그들의 삶과 경험은 그 자체로 사회의 자산이다. 다만 사회가 그것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당장 눈에 보이는 이익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능성이 풍부한 젊은이의 시간은 악착같이 착취하면서 노인의 시간은 삭제해 간다. 사람은 자원이 되고 인간관계는 자산이다. 모든 게 경제적 가치로 계산되는 세상의 반대편에서 실패한 사람들과 대책 없이 나이든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게 제거된다. 창문도 없는 쪽방에서, 고시원에서, 여관방과 반지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조용히 사라진다. 누군가는 당뇨에 쇼크로, 누군가는 무더위에 탈수와 심장마비로, 알콜중독에 균형을 잃고 쓰러져 뇌진탕으로, 그리고 자살로 자신의 흔적을 지워버린다.
한때 나도 그들을 실패자라고 생각하고 다 자기 팔자니 책임이니 뭐 그런 말로 외면했다. 그들 앞에 서게 되니 그들이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들도 나처럼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도 자신과 똑닮은 자식이 있었을 것이다. 희망이 있고 의욕이 넘치고 꿈과 생기로 가득 찬 순간도 있었을 것이다. 한 순간 삐끗한다. 그제야 깨닫는다. 따뜻하고 다정한 줄 알았던 세상이 두 번째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을… 그저 나락으로 미끄러질 뿐이다. 잠깐 뭔가 다시 될 것 같지만 가속이 붙은 추락을 다시 끌어올리지 못한다. 추락을 술이 돕는다. 24시간 티비와 피시방, 인스턴트 음식과 편의점 도시락이 추락의 반주가 된다.
“돈보다 더 소중한 게 있어. 사람들이 그걸 몰라.”
여승은 처음 본 내게 다른 거 하나 묻지 않고 그 말을 했다. 그걸 알았을 때는 너무 늦었어요…낮선 풍경에서 아무 말도 못하는 나를 그녀의 초연한 눈빛이 준엄히 꾸짖는다. 추도사는 고인의 그 어떤 정보도 담고 있지 않았다. 공허하고 추상적일 수밖에 없는 그 글을 메마른 장작 같은 목소리로 읽어 내렸다. 부끄럽게 물러난 그 자리에 스님이 무릎을 꿇고 단정하게 앉았다. 젊고 순진무구한 목소리를 가진 스님의 입에서 믿을 수 없이 깊고 서러운 염불이 흘러나왔다. 우리 말 무상계가 목탁 소리를 타고 유족대기실 밖 로비까지 울렸다.
어리석음 무명으로 말미암아 선악행위 하게 되고 행위로써
인식작용 생겨나며 인식으로 이름형상 생겨나고 이름형상
말미암아 여섯 가지 감관들이 여섯 감관 말미암아 감촉들이
감촉으로 말미암아 느낌들이 느낌으로 말미암아 사랑하는
욕망들이 애욕으로 말미암아 갖고 싶은 마음들이 갖고 싶어
함으로써 존재함을 존재함이 태어남을 태어남이 늙고 죽음
근심걱정 슬픔들을 만드나니 그러므로 무명이란 어리석음
사라지면 행위절로 없어지고 행위역시 사라지면 인식작용
없어지고 인식작용 사라지면 이름형상 없어지며 명과색이
사라지면 여섯 감관 없어지고 여섯 감관 사라지면 감촉들이
없어지며 감촉들이 사라지면 느낌들이 없어지고
느낌들이 사라지면 애욕심이 없어지고 애욕심이 사라지면
갖고 싶음 없어지고 갖고 싶음 사라지면 존재함이 없어지고
존재함이 사라지면 태어남이 없어지며 태어남이 사라지면
늙고 죽음 모든 슬픔 근심걱정 없어지네…
고인의 유골은 분골되지 않은 채로 함에 봉인되었다. 앞으로 10년 동안 무연고 사망자 전용 봉안당(무연고 추모의집)에 봉안된다. 분골하지 않는 이유는 그 안에 가족이 다시 찾아오면 그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