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8일 한국에 사는 원폭 피해자에게도 치료비를 전액 지급해야 한다는 일본 최고재판소(대법원)의 판결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정부 당국자는 이날 "이번 판결을 계기로 국내 거주 피폭자에 대해 일본 내 피폭자와 동등한 원호 조치가 이뤄질 수 있도록 일본 정부가 필요한 조치를 취해나갈 것을 기대한다"며 환영의 입장을 내놓은 것이다. 또한 이 당국자는 “그동안 우리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사할린 동포 문제와 함께 원폭 피해자 문제에 대해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됐다고 볼 수 없다는 입장을 토대로 한일 간 양자협의를 통해 논의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요구했다”면서 “일본 정부가 이번 판결을 계기로 양자협의에 조속히 응할 것을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청구권 협정으로 일본군 위안부와 원폭 피해자의 배상청구권이 소멸됐는지에 대해 양국 간 해석의 차이가 있는 만큼, 이를 논의하기 위한 공식 양자협의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실제 정부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한일 국장급 협의나 구상서 전달 등을 통해 이런 입장을 밝혀 온 것으로 전해졌다. 일본 최고재판소(대법원) 제3부(오카베 기요코(岡部喜代子) 재판장)는 이날 한국인 원폭 피해자 이홍현(69) 씨 등이 일본에 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의료비를 전액 지급하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며 일본 오사카부(大阪府)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치료비를 전액 지급하라는 판결을 확정했다. 이에 정부는 일본 정부가 이번 판결에 따라 구체적으로 어떤 조치를 검토하는지 확인하고 대응 방향을 정한다는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관계자는 "상황을 알아보고, 판결 결과에 따라 피해자들에 대해 적절한 조치가 이뤄지도록 해야 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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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걸려 이긴 날입니다."
한국인 피폭자들을 지원해온 이치바 준코(市場淳子) '한국 원폭 피해자를 돕는 시민모임' 회장이 또박또박 말했다. 8일 오후 4시 30분 도쿄지방법원 2층 기자클럽 브리핑룸(50㎡·15평). 그동안 소송을 도운 시민단체 관계자와 법조인 5명이 '승소(勝訴)' 두 글자를 붓글씨로 써 붙여놓고 기자들을 맞았다. 일본 기자, 한국기자 60여명이 발 디딜 틈 없이 들어찼다. 1시간 30분 전, 여기서 15분 거리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오카베 기요코(岡部喜代子) 판사가 "한국인 피폭자가 한국에서 쓴 의료비를 보전해주지 않는 것은 위법"이라 판결했다. 2011년 한국인 피폭자 이홍현(69)씨가 다른 유족 두 명과 함께 오사카부를 상대로 낸 소송에 대해, 일본 사법부가 최종적으로 한국인 피폭자들의 손을 들어주는 순간이었다. 이 소송 자체는 4년 걸렸다. '40년 걸렸다'는 말은, 이 소송 전에도 수많은 다른 소송이 있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단 의미였다.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으로 모든 배상이 끝났다고 본다. 그래도 피폭자 문제만큼은 인도적 견지에서 지원을 계속했다. 문제는 지원의 폭에서 일본인 피폭자와 한국인 피폭자 사이에 차별이 컸다는 점이다. 그걸 허물기 위해 한국인 피폭자들은 수십년간 끈질기게 싸웠다.
고(故) 손진두(1927~2014)씨는 1970년 피폭 치료를 받기 위해 일본에 밀항했다. 그는 지루한 법정 투쟁 끝에 1978년 "불법입국자에게도 '피폭자 건강수첩'을 줘야 한다"는 최고재판소 판결을 이끌어냈다. '피폭자 건강수첩'이란 일본 정부의 의료비 지원을 받기 위해 기본이 되는 서류다. 이후 일본에 건너가 치료를 받고 돌아온 곽귀훈(92)씨가 "한국에 가서도 '피폭자 건강수첩'이 효력을 잃지 않게 해달라"고 소송을 냈다. 일본 정부는 2002년 2심에서 패한 뒤 더 상고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한국인 피폭자들도 일단 일본에 가서 '피폭자 건강수첩'을 만들어 오면, 한국에 돌아와서도 일본 정부가 제공하는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됐다. 단, 상한선이 있었다. 일본인은 일본에 있건 해외에 있건 무제한 의료비를 지원받지만, 한국인은 '연간 300만원'이 전부였다. 이홍현씨는 바로 이 마지막 장벽을 정조준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온갖 병을 앓았다. 18세 때 어머니가 "실은 네가 내 배 속에 있을 때 내가 히로시마에 있었다"고 털어놨다. 이후 백색반점도 생기고 고혈압과 만성심부전증도 앓았다. 그는 "몸이 아파 직장도 일찍 그만두고 자영업 해서 먹고살았다"면서 "2008년에 치료받으러 히로시마에 갔을 때 '피폭자원호법'을 읽어보고, 차별을 바로잡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했다.
그는 2011년 오사카부를 상대로 그동안 자신이 한국에서 쓴 의료비 2700만원을 보전해달라고 요구했다. 들어주지 않자 소송을 냈다. 또 다른 피폭자 강점경(2010년 사망)씨의 아들과 이근목(2011년 사망)씨의 아들이 소송에 동참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이치바 회장은 액자 세 장을 들고 왔다. 대구에 있는 이홍현씨 사진, 그리고 먼저 세상을 떠난 두 사람의 영정이었다. 소송을 대리한 나가시마 야스히사(永嶋靖久) 변호사가 "오늘 판결 요지는 사실 간단하다"면서 "피폭자라면 어디에 살건 국적과 무관하게 지원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당연한 얘기"라고 했다. 그는 "한국인 피폭자들은 40년간 싸운 끝에 오늘 최후의 법적 차별의 벽을 없앴다"면서 "이번 판결을 기반으로 한국인 피폭자들의 의료비를 정산하고, 구체적으로 보상받는 작업에 착수하겠다"고 했다. 이치바 회장은 "원고의 메시지를 전해드리겠다"면서 이홍현씨와 통화하며 받아적은 글을 기자들 앞에서 읽었다.
"오늘 판결로 더는 의료비를 걱정하지 않고 지원받게 된다면 지금까지 겪은 모든 불안과 걱정을 지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인 피폭자 모두가 승소를 기원해줬습니다. 4년간 의료비 부담도 크고, 생활도 곤란하고 정신적 피해도 막대했습니다. 이번 판결 후 일본 정부와 오사카부가 생명의 소중함을 공유하는 모습을 보이길 바랍니다."
함께 소송을 벌인 유족 이길훈씨가 "아버지가 생전에 '반드시 이겨서 다른 피폭자들에게 위안을 주고 싶다'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는데 판결 전에 돌아가셨다"면서 "도와주신 분들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또 다른 유족 강성준씨가 "내가 재판에 참여할 결심을 한 건, 한이 있는 분들의 마음을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