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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귀국선 '우키시마호' 희생자 추모제 열려

해방 직후 일본에서 우키시마호를 타고 귀국길에 올랐다가 폭침으로 희생된 강제징용 한국인 수천명의 넋을 기리는 합동위령제가 24일 오후 6시 부산시 중구 수미르 공원에서 열렸다. 우키시마호는 1945년 8월 24일 일본 아오모리현 군사시설에서 강제노동했던 조선인 노동자와 가족을 태우고, 귀국길에 나섰다가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로 침몰했다. 이 사고로 배에 타고 있던 수천명이 사망 또는 실종했다. 당시 일본 정부가 폭발원인을 미군 기뢰로 지목하고, 한국인 희생자가 524명이라고 밝혔으나 사고 원인 등을 둘러싸고 의문이 끊이지 않았다. 한국인 생환자와 유족들은 우키시마호 폭침이 일본에 의한 고의 폭발 사건이며, 한국인 희생자가 7000∼8000명에 이른다며 일본 정부에 진실규명을 요구하고 있다.


2005년에는 한국 정부가 진상조사를 벌였지만, 일본 정부의 발표가 부정확하다는 사실 외에는 뚜렷한 폭발원인이나 사망자수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김희로 추모협의회장은 "반드시 일본정부가 왜곡시킨 인류의 만행과 범죄행위를 단죄해 다시는 이런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진상규명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키시마호 폭침 한국희생자 추모협의회'가 주최하는 이 행사에는 100여명의 시민이 참석했다. 위령제에서는 한국인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사와 추모시가 낭독됐고 시민들은 흰 국화를 놓으며 70년 전 비극적인 사건으로 숨진 영혼에게 고개를 숙였다. 행사에 참석한 박정환(31)씨는 "우리 국민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일본과 북한의 만행에 당하고 있다"며 "천안함 폭침 사건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또 행사를 주최한 한 관계자는 "자국민의 피해에 대해서 정부가 더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정부차원에서의 적극적인 움직임을 호소했다.



관련 기사 -->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의 진상



1945년 8월 15일, 꿈에도 그리던 광복(光復)이 됐다. 글자 그대로 어둠에서 '빛을 되찾은 듯한' 기쁨이었다. 당시 일본에 체류하던 조선인 200만여 명은 고국으로 돌아갈 행복한 꿈에 부풀었다. 그중 귀국 1호선에 탄 조선인 노동자와 가족들은 이 배를 타면 고향에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부산항을 향하던 우키시마호는 항해 도중 갑자기 원인 모를 폭발사고로 침몰했다. 그렇게 수천 명의 조선인은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채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지난 5일 부산시청사에서는 '귀국 1호선 우키시마호 폭침 진상규명' 국제 세미나가 열렸다. 우키시마호의 침몰 원인에 대해 고찰하고 일본의 과거 청산과 우키시마호 사건 해결을 위한 방안에 대해 모색하는 자리였다. 이날 전재진 우키시마호 폭침 진상규명회 회장은 "지난 23년 동안 생존자들에게서 증언을 채록한 결과, 우키시마호 침몰 원인인 폭침은 사전에 일본이 의도한 계획이었다"고 주장했다. 전 회장은 출항 전 배에 자폭장치를 부착했다는 선원의 증언, 부산항을 향한 직항로를 택하지 않고 일본 본토 연안을 따라 남하한 정황, 255명의 일군 해군 승무원 중 230명이 폭발 직전 미리 보트를 타고 하선한 점 등을 그 증거로 제시했다.


1945년 8월 24일 일본 해군의 군수물자 수송선이던 우키시마호가 수천 명의 사람들과 함께 침몰하자 일본 해군은 사고 경위에 대해 "미군이 투하한 기뢰를 건드려 침몰했다"고 짧게 발표했다. 유가족들은 우키시마호가 침몰한 지 27년이 지난 1972년에 이르러서야 일본 시민단체의 도움으로 일본 당국이 작성한 549명의 사망자 명부를 겨우 얻었다. 당시 정확한 승선 인원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하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일본은 우키시마호에 정원(841명)의 10배 가까운 인원을 억지로 탑승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전재진 회장의 논문에 따르면 우키시마호에는 한국인 8200여 명이 승선했다가 5000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 계산이 맞는다면 배에서 살아 돌아온 3200여 명 가운데 현재까지 살아있는 우키시마호 생존자는 단 두 명이다.



"나는 우키시마호에 탔다가 부서진 돛대 꼭대기에 매달려 두 시간을 버티며 기다린 끝에 구조돼 살아 돌아온 사람입니다. 당시 배 안에서 왜 부산으로 바로 가지 않느냐고 선원에게 묻자 '기름과 물이 떨어졌다'는 핑계를 대었습니다."


세미나에 참석한 생존자 이철우(90) 옹의 증언이었다. 고령으로 정확치 못한 발음이었지만 그는 할 말이 많은 듯 힘겹게 한참동안이나 말을 이어갔다. 


"배가 폭파하기 전 일본 해군 승무원 수백 명이 보트를 타고 우키시마호에서 빠져나가는 모습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일본 민간단체 '강제동원 진상규명 네트워크'의 코바야시 히사토무 사무국차장은 우키시마호 사건에 대한 본질적 과제를 3가지로 꼽았다. 희생자들의 사망 원인을 규명하고, 일본정부가 사실에 대해 사죄하고 배상하며, 일본정부가 보관하고 있는 우키시마 사건 희생자의 유골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코바야시 차장은 또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의 해결을 위해서는 한국정부가 일본정부에 공식적으로 진상규명과 문제해결을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복 70년,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으로 수 천명의 조선인이 바다 속에 묻힌 지도 70년이 됐다. 한국 정부는 지금껏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에 대해 일본에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진상규명을 요청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일본 교토의 군항 마이즈루(舞鶴)에서 300m 떨어진 연안. 그곳에는 광복의 기쁨을 누리지도 못한 채 수장된 수 천명의 조선인들이 고국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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