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오후 서울 중랑구 망우리공원묘지.
'꽁꽁' 얼어붙은 한일 관계와는 대조적으로 봄을 알리는 빗방울이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양국 국민 50여명이 엄혹했던 일제강점기에 조선을 사랑했던 일본인 형제의 넋을 함께 기렸다. 이날의 주인공은 84년 전 세상을 떠난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1891∼1931)와 그의 형 아사카와 노리다카(淺川伯·1884∼1964).행사는 시민단체 '이수현 의인 문화재단설립위원회'가 지난 2001년 일본 도쿄 신주쿠 JR신오쿠보역에서 철길에 떨어진 일본인을 구하려 자신을 희생한 이수현 씨의 이타정신을 기리는 차원에서 한국에 헌신적인 사랑을 보여준 아사카와 형제를 추모하고자 마련됐다. 아사카와 다쿠미는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총독부 임업연구소에서 근무하며 당시로는 획기적인 '오엽송 노천매장법'이라는 양묘법을 개발해 조선의 산림녹화에 힘쓴 인물이다. 그는 "조선식 장례로 조선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겨 세상을 뜨고서도 일본이 아닌 조선땅 망우리공원묘지에 묻혔다. 이날 행사에는 위원회 관계자뿐 아니라 아사카와의 고향인 야마나시(山梨)현 호쿠토(北杜)시에서 온 시민 8명과 한국의 청량고생 11명도 함께 해 의미를 더했다. 청량고는 학생 인성교육 차원에서 아사카와 형제를 소개했다고 한다. 기모노, 한복, 교복, 양복 입은 참가자들이 서로 뒤섞여 있는 모습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을 사랑했던 아사카와 다쿠미의 뜻을 보여주는 듯했다.
아사카와 형제 추모회의 나가세키 후쿠지 회장은 "아직 다쿠미 선생을 생각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에 감사함을 느낀다"며 "오늘 이 자리가 앞으로 한일 간 인연이 더 강해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형 아사카와 노리다카는 조선의 도자기에 매혹돼 서울에서 교사로 일하며 30여 년간을 도자기 연구에 쏟아부었다. 그는 조선 8도의 도요지 700여 곳을 찾아다니며 관련 연구에 천착해 '조선 도자기의 귀신'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아사카와 형제는 이 밖에도 오늘날 국립민속박물관의 기원이 된 '조선민족미술관'을 세워 문화재 보존에도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행사에 참여한 박홍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아사카와 형제는 지금처럼 한일 관계가 얼어붙어 있을 때 양국 국민에게 교훈을 주는 의인"이라며 "이수현 씨도 그렇고 아사카와 다쿠미도 양국 국민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했다. 행사는 양국 참가자들이 하나가 돼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노서균 경북예고 학생의 바이올린 연주에 맞춰 부름으로써 끝이 났다. 강지원 이수현 의인 문화재단설립위원회 위원장은 추모사를 통해 "우리는 태어난 나라와 민족으로 서로 구분하고 경계 지어 벽을 세우는 이기적인 시대에 살고 있다"며 "아사카와 형제는 그 벽을 넘고 경계를 초월한 삶을 살았다"고 국경을 넘어 사랑을 실천한 형제의 뜻을 기렸다. [연합뉴스]
아사카와 다쿠미 기리는 추모객들(서울=연합뉴스) 양지웅 기자 = 2일 오후 서울 중랑구 망우리 묘지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1891∼1931) 묘역에서 이수현 의인 문화재단설립위원회 주최로 열린 84주기 한·일 합동 추모식에서 참석자들이 묵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