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상조업계가 가장 활성화 되었던 시기는 2010년부터 2015년 정도라고 볼 수 있다. 2000년대 들어 그야말로 우후죽순처럼 상조회사 설립이 늘어나 2010년 기준 337개소에 이르렀다. 5천만 원이란 자본금 규모가 부담없다는 상황과 소비자의 상조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어 회원모집 영업이 비교적 쉬웠다. 이런 흐름을 간파한 장례 사업자들이 너도나도 상조회사를 설립하는 붐을 이루었다.
2000년대 들어 불과 10년 사이에 337개로 늘어났던 상조회사가 고객들이 맡긴 행사비를 무책임하게 횡령하고 그 부작용이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게 되었다. 공정위를 앞세운 정부의 관리가 대폭 강화되어 부실한 소규모 상조회사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2010년 337개소가 2015년에는 228개소로 줄어들어 불과 5년 사이에 100개 상조회사가 사라진 것이다. 거의가 흡수합병, 통합의 형태였다. 이런 군소 상조회사 회원들을 '통합상조 시스템' 개념으로 손쉽게 끌어모은 새로운 사업자가 생겨난 것은 업계가 다 아는 사실이다. 흡수통합되는 상조회사들의 회원자격과 불입금의 향방이 가장 큰 문제였고 상조소비자들의 막대한 피해가 발생한 것도 이 기간 중이었다. 흡수하는 입장에서는 기왕에 불입되어 모두 사라진 불입금을 부채로 떠안을 이유가 없으므로 다만 흡수 이후의 행사 제공과 불입금 관리만 약속하는 조건이었다. 그때까지 군소 상조회사에 가입한 수많은 고객들은 자신들의 의견과는 전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피해를 당한 것이다.
전국에서는 처음으로 부산지역에서 상조업체를 상대로 한 집단분쟁조정 1호가 개시된 데 이어 2호가 잇따라 예정돼 있는 등 잇단 '부산발(發) 상조업체 분쟁'에 따른 파장이 예상된다는 기사 이미지 [2009-09-07 부산일보]
그러한 혼란스러운 기간 중, 업계에서 친밀하다고 할 수 있는 강 모씨가 군소 상조회사 통합상조 시스템(회사) 설립과 그 관리와 운영 시스템 구축 작업에 필자의 도움을 요청해 왔다. 필자는 그때까지 '상조이행보증주식회사'를 운영하면서 상조업계에 일정한 인지도와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 제안이었다. '상조이행보증주식회사'의 내력과 운영 등에 대해서는 곧 소개하기로 하고 우선 상조파해자들과의 만남을 먼저 언급하고자 한다.
필자는 그 때까지는 기획과 미디어, 마케팅 등을 주로 해 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상조시장의 밑바닥 현장을 몸소 체험할 기회가 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3개월 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당시의 상조회사 운영이란 어떻게 보면 거의 범죄행위에 준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운영실태에 큰 충격을 받았다. 우선, 상조회원이 된 과정에는 스스로의 판단으로 가입한 경우가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은 친인척이나 친구 등의 적극 권유로 마지못해 가입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상조의 성격을 차츰 이해하면서 은행에 저금하는 마음으로 성실히 불입해 온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낯선 상조회사에서 고객이 가입한 상조회사가 모 상조회사로 흡수 통합되었으며, 그러나 안심하고 계속 회원 자격을 유지토록 해달라는 일방통행식 통고문이었다.
2005년 10월 하늘문화신문 주관 일본연수시 브리핑후 필자와 인사하는 요시다 일본상조협회장
관련기사 ->장례업의 미래, 어떻게 살아 남을 것인가, 일본 메모리드 그룹 요시다회장의 강연요지
http://www.memorialnews.net/news/article.html?no=240
당시 필자가 도와 주었던 일은 그러한 고객들의 문의 전화에, 통합과정의 상황을 잘 설명하여 이후에도 해지하지 말고 회원 자격을 계속 유지해달라고 권고하는 업무인 셈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말은 간단하고 쉽지만 정작 일방통고를 받은 소비자들에게는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처사였다. 알지도 못하는 상조회사 자동이체 시스템을 계속 유지해 달라? 그러면 지금까지 불입한 금액은 어떻게 되는가? 유사시 행사는 안심할 수 있는가? 불안한 가운데 그들 대부분의 선택은 "당신네 상조회사를 못 믿겠으니 탈톼하겠다, 불입금을 돌려달라.'는 요구였다. 문제는 흡수한 상조회사는 종전 회사에의 불입금과는 상관이 없고 다만 앞으로의 불입금 관리와 유사시 행사만은 책임지겠다는 답 또한 변경할 수 없는 업무 지침이었다.
그 과정에서 '왜 소비자의 요구대로 해주지 않느냐?' 와 '해지는 해 줄 수 없다'는 회사의 답변이 팽팽하게 대립하면서 언성이 높아지고 격한 감정으로 크게 언쟁이 벌어지는 현장을 100일 동안 지켜보게 된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