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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여인’ 꽃밭에 잠들다, 천경자 화백 별세 상보

[예술원 별세 확인]  한 줌 재로 돌아온 천경자 '93명의 자식' 보고 떠나다

지난 8월 20일 오전 8시 30분 덕수궁 돌담길 옆 서울시립미술관. 개관 시간(오전 10시)을 1시간 30분 앞두고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 유골함과 영정 사진을 들고 미술관에 도착했다.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여인은 담담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미술관 안으로 한 발짝 한 발짝 내디뎠다. 행여 떨어뜨릴까 봐 여인이 두 손에 단단히 든 유골함 속 한 줌 재로 남은 이는, 2주 전인 8월 6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 맨해튼 자택에서 아흔한 살 생(生)을 마감한 '꽃과 영혼의 화가' 천경자 화백이었다. "엄마 '자식'들 여기 있어요. 이제 편히 가세요." 담담했던 여인의 어깨가 흔들렸다. 여인은 1998년 천 화백이 미국으로 건너간 뒤 함께 살았고, 2003년 뇌출혈 후 줄곧 병석에 있었던 천 화백을 간호한 맏딸 이혜선(70·섬유 디자이너)씨였다. 서울시립미술관은 1998년 천 화백이 그림 93점을 기증한 곳이다. 딸은 어머니의 마지막 길, 당신이 때로 자식보다 때로 목숨보다 아꼈던 그림을 보여 드리기로 했다. 8월 중순 미국에서 귀국해 시립미술관으로 향했다.


유골함은 그림 30여점이 걸려 있는 2층 '천경자 상설 전시실'을 돌아 나머지 작품이 걸린 수장고를 향했다. 끽연가(喫煙家)였던 어머니처럼 담배 한 개비 손가락 사이에 끼운 여인을 그린 '여인의 시 1'(1984년), 스물둘 어머니의 모습을 담은 자화상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1977년)…. 한 점 한 점 눈에 꼭꼭 담아 가시라고 93점 모두를 찬찬히 둘러봤다. '자식 93명'을 보여 드렸다. 일부 그림 앞에서 딸은 품에 안긴 어미에게 흐느끼며 속삭였다. 1시간 남짓한 시간이 흘렀다. 이씨는 수장고를 함께 돈 서울시립미술관 관계자 2명에게 "아직 정리할 게 많고 개인적인 일이니 내가 공개하기 전에 어머니 죽음은 절대 알리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이날 이씨 옆엔 양복 차림의 남성 유호상(59·서울 강동구청 행정안전국장)씨가 있었다. 몇 년 전부터 미술계 인사들과 소식을 끊은 이씨가 국내에서 연락하는 몇 안 되는 이로 전 서울시 문화관리팀장이었다. 유씨는 천 화백이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한 작품 관리 업무를 맡았던 인연이 있다. 19일 유씨는 서울시 문화정책과에 전화해 이씨가 천 화백의 유골함을 들고 시립미술관을 돌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서울시는 이를 허가했다. 천 화백이 회원으로 있었던 대한민국예술원은 22일 천 화백의 별세 소식을 공식 발표했다. [조선일보]


“딸 이씨, 8월 말 유골함 들고 수장고 다녀가”



천경자 화백은 2003년 뇌출혈로 쓰러진 뒤 외부와의 접촉이 끊겼다. 10여 년 동안 아무도 그를 만났다는 사람이 없자 미술계에선 그의 생사 여부가 논란거리로 떠올랐다. “이미 사망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고 급기야 대한민국예술원이 천 화백의 근황이 확인되지 않는다며 지난해 2월부터 월 180만원의 수당 지급을 잠정 중단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당시 예술원이 생사 확인을 위한 의료기록 등을 요청하자 화백의 딸 이혜선(70)씨는 “살아있는 천 화백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며 반발, 예술원에 회원 탈퇴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그의 타계 소식은 지난 8월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처음 전해졌다.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장은 22일 “천 화백의 딸 이씨가 8월 말 미술관에 유골함을 들고 와 수장고에 다녀갔다. 이씨와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했지만 거절당해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이씨가 미술관 직원에게 화백의 타계 사실을 절대 함구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해서 그동안 알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2일 천 화백의 사망을 공식 발표했다. 문체부는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천경자 예술원회원의 별세(2015년 8월 6일) 사실을 확인하였으며, 후속 행정조치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예술원은 2014년 2월부터 올해 8월까지 19개월치 수당 총 3420만원과 장례비 보조금 100만원을 지급한다. 예술원 측은 “천 화백의 유족 가운데 어느 분에게 지급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법적인 추가 확인 절차가 필요하다”고 전했다.[중앙일보]


[천경자 1924~2015] ‘꽃의 여인’ 천국의 꽃밭에 잠들다

1924년 고흥읍에서 태어난 천 화백은 일본 동경여자미술전문 학교에서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1944년 귀국 후 전남여고와 광주사범학교 미술교사로 근무하며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는 당시 화려한 채색화를 선보이며 수묵화 일색이던 국내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줬으나, ‘일본 화풍’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1952년 동생의 죽음을 형상화한 ‘생태’(生態)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했다. 이후 여인의 한(恨)과 환상, 꿈과 고독을 화려한 원색으로 표현하는 독보적인 화풍을 개척했다. 그는 1991년 ‘미인도’를 둘러싼 위작 시비로 최대 시련을 맞았다. 정신적 충격 속에 절필을 선언하고 뉴욕행을 택한 계기가 됐다. 천 화백의 대표작으로는 고향 언니를 그린 ‘길례언니’(1973), ‘고(孤)’(1974년), ‘황금의 비’(1982년) 그리고 자화상 격인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1977) 등이 있다. 그는 화가이자 문필가로서 수많은 일간지에 글을 연재했고 ‘언덕 위의 양옥집’, ‘아프리카 기행 화문집’ 등 수필집과 단행본 10여권을 냈다. [무등일보]



그림에세이 개척한 '문필가' 절판 중고도서들, 애초 정가보다 비싸게 거

"작업이 잘 될 때에는 눈앞의 작품에서 어머니의 젖, 혹은 번데기를 아주 아주 농축한 것 같은 진한 향기와 고소한 맛이 난다. 나는 그것이 생명의 향기라고 믿는다. 그러한 느낌을 느끼게 되는 때가 서툰 내 인생살이에 더욱 아름다운 활력소와 비타민이 되어 나를 생기 있고 팔팔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림 작업은 내게 신앙이다." (천경자, '꽃과 영혼의 화가' 118쪽, 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화려한 원색의 한국화풍을 개척했던 고(故) 천경자 화백은 톡톡 튀는 말솜씨와 유려한 글솜씨까지 갖춘 다재다능한 예술인으로도 족적을 남겨왔다. 22일 사망 소식이 알려지면서 천 화백이 쓴 절판된 출간물들이 애초 정가보다 높은 가격에 거래되는 등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교보문고 온라인 중고장터에 따르면 정가 1만5천원인 '꽃과 영혼의 화가'가 2만원대에, 화집 '그 생애 아름다운 찬가' 등은 15만~20만원대 가격에 매물로 올라 있다. 출판계에 따르면 천 화백은 자신의 그림 등에 얽힌 사연을 함께 담아낸 '그림에세이'의 영역을 새롭게 구축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1978년 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과 에세이집 '탱고가 흐르는 황혼'(1995), '꽃과 색채와 바람'(1996), '나는 내 삶을 살고 싶다'(1999) 등 단행본으로 엮인 저술만 10권이 넘는다. 천 화백은 여인의 한(恨)과 환상, 꿈과 고독을 화려한 원색의 한국화로 그려 1960~1980년대 국내 화단에서 여류화가로는 보기 드물게 자신의 화풍을 개척했고 문화예술계 전반에서 폭넓게 활동했던 '스타' 화가였다. '미인도'를 둘러싼 1991년 위작시비에 이은 절필, 이후 사망 소식이 전해지기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노년의 삶 등 그의 후반기 삶은 순탄치 않았다. [무등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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