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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 맏며느리의 세계

▶종가의 맏며느리(宗婦)는 통상 결혼 후 선대 종손인 시아버지의 삼년상을 치르고 길제(吉祭)를 거쳐야 정식으로 종부 지위를 얻는다. ‘예기’에 따르면 집안 맏며느리로서 가사를 통솔하고 책임진다. ‘여중군자(女中君子)’로서 ‘상봉하솔(上奉下率)’의 문화를 실천했다.
▷"네가 열일곱 살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스물아홉 꽃다운 청춘에 남편을 독립운동으로 잃고 앉은뱅이 시아버지의 그림자처럼 지내며 손발 노릇 다 하였구나… 네가 아니면 내가 없었고… 내가 죽고 없더라도 동강 종가를 네가 좀 지켜다오." 무대 위 한복 차림의 노인이 손자며느리에게 당부하는 장면을 끝으로 조명이 서서히 지자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10일 경북 예천문화회관. 국학진흥원(원장 김병일)이 주관하고 경상북도가 후원한 제5회 "종가(宗家) 포럼" 부대 행사였다. "점필재 종택" "의성김씨 사우당" "예안이씨 충효당" "광산김씨 예안파 종택"…. 이날 일찍부터 회관 입구에 줄지어 선 수십 개의 종택 기들이 한눈에 행사의 규모를 알렸다. 20분 남짓한 연극의 제목은 "내 저거라꼬는 없었어". 일제강점기 유학자로서 독립운동을 벌인 심산 김창숙(1879~1962) 선생 며느리이자, 의성 김씨 동강 종택의 14대 종부인 손응교(93) 여사를 소재로 한 창작극이다. 손 여사는 현재도 경북 성주에 있는 종택에 산다. 심산 선생의 독립운동을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한 후 기울어가던 종가도 거의 혼자 힘으로 지켜 오늘에 이르게 했다. 탤런트 김용림씨가 연기한 손 여사는 이번 포럼 주제인 "종부, 섬김과 나눔의 리더십"의 살아있는 상징이었다.

종가라면 김치 상표부터 먼저 떠올릴 세태에, 이날 행사는 500여년 종가 문화를 실질적으로 전승해온 주역, 종부의 실체를 다양하게 조명했다. 종부의 일생을 담은 동영상 상영에 이어 내방가사 가창도 있었고, 학술 강연, 사진작가 이동춘씨의 종부 문화 사진전도 열렸다. 이날 학술회의 주제발표를 맡은 강혜경 서강대 교수는 "종부에게는 자신을 낮추고 행위 전면에 자신의 주장을 드러내지 않는 미덕이 요구됐다. 그 유교적 도덕성과 종부 정신은 유교 친족 공동체 사회적 조건 하에서 돌봄의 가치를 창출해낸 정신적 자양분을 가지고 있었으며 최초의 우리 사회 복지에 기여한 복지 제공자였다"며 "이런 종부 정신은 현재 우리 사회에 유용하게 적용할 자원으로 재인식되어야 한다"고 했다.

회관 앞 광장에는 경북 지역 7개 종가의 대표 가양주(家釀酒)와 6개 종가의 주안상 차림 축제판이 벌어졌다. 예천 안동권씨 춘우재 종가의 천향국주, 경주 여간이씨 회재종택의 청주, 영양 재령이씨 석계종택 감향주, 안동 진성이씨 노송정종가의 좁쌀술, 현풍의 현풍곽씨 포산종택의 스무주 등과 경주 최씨 잠와종가, 예천 권씨 초간종가, 안동 의성김씨 학봉종가…. 수백 년에 걸쳐 제사와 접대를 위해 빚어온 전통주와 주안상이 푸짐했다. 시조모인 이위증(82)씨 함께 왔다는 재령 이씨 종부 이수빈(26)씨는 "종갓집 맏며느리라고 하면 으레 어렵고 힘들겠다고들 말하지만, 나름대로 자부심도 있고 힘이 되는 것도 많다. 오늘 하루 여러 종부님들로부터 참 많은 것을 듣고 배웠다"고 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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