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동부이촌동)에 사는 올해 여든 둘의 손성호(孫星湖)씨. 편도 3시간 넘게 걸리는 250㎞ 길을 말 그대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 번 거름 없이 찾아 왔다. 토요일 아침 그는 서울역에서 무궁화호 열차를 탄다. 대전을 지나 김천역에 내려 버스를 타고 봉계리 고향집에 들른다. 점심 삼아 후딱 밥 한 술 뜨고는 자전거에 낫과 담배, 상에 올릴 과자와 사탕을 챙겨 싣고 산으로 향한다. 부모 산소를 마주하고 앉아 한 주일간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바이올린을 꺼내 부모님이 좋아하던 가락들을 풀어놓는다. 대개 5∼6시간. 해가 질 때까지 머문다. 철마다 좋은 꽃 보시라고 목련·백일홍·진달래·벚꽃 등 수십 가지 꽃나무를 하나씩 사다 날랐다. 묘를 빼곡히 둘러싼 꽃나무가 어느덧 300그루가 넘는다. 벌초는 아이 머리 깎듯 낫으로 하고, 묘지 가운데는 어두운 데 계시지 말라고 석등을, 봉분 옆에는 심심할 때 타고 노시라고 양(羊) 모양의 석상을 세웠다. “이놈의 ‘빠이롱(바이올린)’만 보면 부모님이 떠올라 눈물나.” 1924년 외아들로 태어나 부모님 사랑을 독차지했던 손씨. 15살 때 이웃집 형이던 작곡가 나화랑(羅花郞·1921~1983·‘무너진 사랑탑’, ‘청포도 사랑’ 등 작곡) 선생이 연주하던 바이올린 소리에 반했다. 어머니를 졸라 논 네 마지기값(32원)에 이탈리아제 바이올린을 구했다. ‘딴따라 될 거냐’며 불호령 내리시는 아버지를 피해 화장실에 숨어 연습한 적이 한 두 번 아니고, 악보를 사려고 아버지 서랍에서 돈을 훔친 적도 있다. 바이올린 탓인가, 중학교는 그의 마지막 학력이 됐다. 그는 “평생을 함께 한 친구지만, 이놈 때문에 부모님 속 썩인 죄스러움은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1964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김천에서 교도관으로 일하던 그는 10년 넘게 매일 출근 전 산소에 들러 지난날 잘못을 고했다. 그러다가 공무원생활을 마친 1977년 나화랑 선생의 권유로 연주자 활동을 위해 고향을 떠났고, 이듬해 어머님도 돌아가셨다. 손씨는 이때부터 주말마다 고향과 부모님 산소를 찾았다. 벌써 30년, 아버지 묘소를 찾던 세월을 보태면 43년째다. 지난 6월에는 아내도 이곳에 묻었다. “효도? 난 효도하고 있는 게 아니라 불효를 반성하고 있는 거야.” 그는 “오래 하다 보니 그냥 내 생활의 일부가 된 거지”라고 했다. 해질녘, 손씨는 짐을 챙겨 산을 내려갈 채비를 마치더니 외치듯 얘기했다. “아버지! 어머니! 한 주 동안 잘 계세요.” 이렇게 1주일 뒤 만남을 약속하고는 마지막으로 ‘툭툭툭’ 아내의 봉분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이런 그를 수십년 지켜봐 온 봉계리 주민들은 “효자비(碑)를 세워야 한다”며 추진위원회를 만들었다. 주민 이상기(78)씨는 “말이 30년, 40년이지, 그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냐”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