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년 만에 찾은 내 아버지 강 일병" ●작년 국군 유가족 행사서 채혈 ●국방부 연락에 "기적…" 감격 ●한많은 세월 지나 가족 품에 ●1950년 7월 5일. 강 일병이 소속된 국군 9연대는 수원에서 수도사단 1연대로 편입됐다. 아니, 더 이상 9연대라고 부르기도 힘들었다. 이미 포천, 의정부, 한강방어선을 거치며 전력은 전멸되다시피 한 상태였다. 쓰러져 가는 전우를 보고도 눈물 흘릴 새조차 없이 남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대전에 이어 충북 영동에서 다시 적군과 조우했다. 7월 하순의 어느 날(18~21일)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박격포탄을 다 쏘고 나면, 무거운 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삼각자로 박격포 계측을 하던 강 일병이 복부에서 뜨끈함을 느꼈다. 맞았나? 허리춤에 찬 수통을 관통해 복부를 파고 든 총탄. "강 일병! 정신 차려." 박 일병? 김 하사님? 사랑하는 아내의 목소리도 들린다. 불쌍한 사람. 17살에 시집와서 몇 년 같이 살지도 못하고 남편을 군대로 떠나 보냈다. 우리 아들 준석이는 이제 4살이네. 제법 말도 잘 할 텐데…. 준석아, 아빠 금방 갈게…. 22살 강 일병의 입술이 떨렸다. 2007년 2월. 충북 영동군에서 벌목공사 중 한국전 전사자로 추정되는 유해가 발굴됐다. 총탄 자국 2발이 선명한 수통, 삼각자, 숟가락, 손목시계가 함께 나왔지만 신원을 확인할 만한 단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마지막 수단은 유전자(DNA) 검사. 하지만 지금껏 무작위 DNA 검사로 신원을 확인한 경우는 없었다. 2007년 5월. 강준석(62)씨가 분당 국군수도병원을 찾았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서 국군 유가족 채혈행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터였다. 실낱 같은 희망을 안고 아직도 홀로 지내시는 어머니(민정희ㆍ82)를 위해 준석씨는 팔을 걷어붙였다. 2008년 3월 26일. 충북 영동의 야산 중턱에 묻혀 57년을 지내고, 다시 이름 없는 유해로 1년을 지낸 강 일병이 마침내 이름을 되찾았다. |
중화기 중대 소속의 박격포 운용병으로 추정됐다. 유해발굴감식단장 박신한 대령은 "2000년 전사자 유해발굴사업 개시 이래, 신원확인을 할 수 있는 단서 없이 축적된 DNA 자료 비교를 통해 신원이 확인된 최초의 사례"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채혈에 참여한 국군 유가족은 3,600여명. 이들의 DNA를 신원 확인이 안된 발굴 유해 1,600여구의 DNA와 일일이 비교 대조해 발견한 성과였다. 발굴되지 않은 국군 전사자가 13만명인 점을 감안하면 성공 확률은 매우 낮았다. 아들 준석씨는 "항상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못했는데 기적이 일어났다"고 했다. 아내 민정희씨는 "너무나 많은 세월이 지나 마음 한 구석에 한으로 남았는데, 유해가 발견됐다니 남편이 마치 살아온 것 같다"고 감격해 했다. 강 일병은 다음 달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된다. 그가 묻는다. "박 일병, 김 하사님은 아직 못 찾았습니까?" "준석엄마 보시오. 웃음으로 전송하여 주는 당신의 마음도 잘 알고 있소. 떠나는 이 사람은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일이오며 부모 모시고 잘 있을 줄 믿으며 준석이도 잘 노는 줄 믿고 있습니다. 내가 없더라도 집안에 웃음으로 화목하게 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49년 1월 입대 직후 부인에게 쓴 첫 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