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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뉴스

50대에 꽃피운 만학의 가수 하춘화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 뒷바리지 아버지께 영광을

 
“이제 시작입니다. 축하를 받아도 실감이 안 나고, 기쁨보다는 앞으로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될까 그런 고민만 앞섭니다.”

‘리사이틀의 여왕’으로 세계기네스북에 등재된 가수 하춘화(51)씨가 지난달 25일 성균관대 후기 학위수여식에서 예술철학박사 학위를 받아 기록 하나를 더했다. 그녀는 살아있는 기록의 전당이다. 1,800여 회에 달하는 개인 공연, 최연소(6세) 독집 앨범 발표, 최연소(11세) 음반사 전속, 1971~77년 연속 MBC 10대 가수상 수상, TBC 방송가요 대상 4회 수상, TBC 7대 가수상 연속 7회 수상 등 수백 회의 수상 기록을 비롯해 2,500여 곡의 신곡 취입 등은 모두 그녀가 남긴 전인미답의 기록들. 음악활동과 더불어 오랜 기간 불우 이웃을 돕는 봉사활동으로 문화훈장까지 수상했다. 아무도 가보지 않는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외롭고 힘겨운 일. 그래서 불혹의 나이에 시작해 꽃피운 그녀의 만학 열정은 인터넷 검색어 7위에 오르며 뜨거운 화제가 되었다.

하춘화씨의 박사학위 소식으로 신문과 방송이 떠들썩했다. 50을 넘긴 유명가수의 기분 좋은 성공담이기 때문일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가수라는 직업을 지적인 대상으로 보지 않는 우리 사회의 해묵은 편견이 여전하다는 반증은 혹 아닐까? 학위수여식에 온 후배 가수들이 ‘오늘 나도 수준이 업 되는 기분’이라며 부러움을 표시했던 것처럼. 일부기자는 “최초의 박사가수 탄생이냐?”고 묻기도 했다. 실제로 국내 가요계에 박사가수는 많지 않다. 경산대학원에서 보건학 박사학위를 받은 김태곤씨와 2집까지 발표한 치의학박사가수 이지영 그리고 러시아에서 대체의학 박사학위를 받은 방주연씨 정도가 언뜻 떠오른다.

가수 하춘화씨의 고된 만학의 길은 대중적 영향력과 사회 기여도에 비해 45년 음악인생 내내 절감해온 사회 편견에 대한 외로운 도전이다. 불혹의 나이에 다시 시작한 공부는 힘겨웠다. “그동안 대중가수는 사회적 영향이나 기여에 비해 ‘딴따라’로만 폄하 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가요의 가치를 실증해 가요계에 작은 보탬이 되고 싶었어요.

그 동안 국회도서관, 독서실, 고시원을 전전하며 하루 평균 4시간만 자는 수험생 같은 생활을 했습니다. 그 바람에 시력이 크게 나빠졌습니다. 방송하다가 학교로 달려가 레포트 발표하고, 강의를 듣다가 부랴부랴 지방으로 공연을 떠나다 보니 펑크도 내고…. 학생, 가수, 주부까지 1인 3역의 생활이 너무 어려워 포기하고 싶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지요.”

본인의 열정도 대단했지만 가족의 도움도 컸다. “논문 자료 수집과 교열을 도와주며 용기를 준 남편이 가장 큰 힘이 됐어요. 부모님과 가족의 기대도 커서 꼭 결실을 맺고 싶었죠.” 박사 형제ㆍ자매가 2명인 고학력 집안의 분위기도 한 몫 했다. “각오는 했지만 박사 과정이 이렇게 힘든 줄 알았다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2차 논문 심사 후 탈진해 입원까지 했어요.”

하씨의 영광 뒤엔 숨은 공로자가 있다. 부친 하종오(88) 옹이다. “내 자식이지만 학위까지는 기대 못하고 수료 정도는 생각했는데 너무 감격스럽다.”는 하 옹은 1980년까지 그녀의 그림자 역할을 하며 대스타로 키워낸 하춘화의 살아있는 박물관이다. “처녀 시절 방송국 주변에서 저 때문에 하춘화는 연예도 못 한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늘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으니까요”

그가 하춘화의 데뷔 때부터 현재까지 모아온 자료의 양은 어마어마하다. 1권당 1,000쪽에 가까운 금박 정장의 스크랩북만 20여 권이 넘는다. 그 책 속에는 몇만 점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신문과 주간지 기사, 사진이 들어있다. 그 동안 활동해 온 방송 영화 동영상도 DVD로만 90여 개나 된다고 한다. DVD는 개당 2시간 분량으로 모두 1,800여 시간의 엄청난 분량이다. 발표한 모든 음반과 음원은 기본이다.

그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소장품은 45년 동안 팬들이 보내 온 수십 권의 스크랩과 수십 가마니 분량 중 엄선한 412통의 팬레터. “이번 박사학위 공부에 이 자료들은 직접적인 도움이 되진 않았지만 기초지식과 자료는 되었을 것입니다. 작고한 일본의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처럼 이 방대한 자료들을 가지고 하춘화 전시관을 꼭 세우고 싶습니다.”

90을 바라보는 하종오 옹은 세상을 뜨기 전에 딸자식을 키워낸 이야기를 책으로 남기고 싶어 작년부터 집필에 들어갔다. “자료를 확인하면서 쓰다 보니 한 3년 걸릴 것 같습니다. 2007년쯤에야 끝낼 수 있겠내요.”

천재 꼬마가수로 불렸던 그녀는 데뷔시절 ‘하춘화와 삼남매 꼬마가수’로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몰고 왔다. 그녀가 출연하는 극장은 밀려드는 관객들로 유리창과 의자 30-40개는 기본적으로 깨지고 부서졌다. 1970년 15세 중학생 시절 ‘물새 한 마리’로 스타덤에 올랐다. 팬레터가 하루 500여 통이 답지했던 그때 정상적인 학업은 불가능했다. 수석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바쁜 가수활동 때문에 학교장의 양해로 2년간의 학업 공백을 가져야했다.

이후 늘 공부에 대한 갈증을 느껴왔다. 25살에 경남대 2년 과정을 수료한 하씨는 15년이 지난 1996년 드디어 작심을 했다. 40세의 나이에 한국방송통신대 가정과에 편입했던 것. 뒤늦게 공부에 불이 붙었다. 2000년 동국대에서 공연예술 석사학위를 받았고, 내친김에 가수들의 권익신장을 위해 저작권법을 공부하려 법대 대학원 박사과정에 응시했다. 그러나 법대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2년간 세 번이나 낙방했다. 전공을 변경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이번에 예술철학박사모를 썼다. 딱 10년이 걸렸다.

하씨는 논문에서 "70년대 가요 80곡으로 대중의 선호 성향을 조사한 결과, 우리 가요팬들은 도시를 지향하면서도 고향을 그리워하고, 희망을 가지면서 과거를 추억하고, 만남을 가지면서도 이별을 경험하고 기쁨과 동시에 슬픔을 느끼는 이중적인 정서 성향을 보였다"고 주장했다. 하박사를 지도한 박상환 교수는 “수용미학적인 관점에서의 하씨의 연구는 주목할만한 새로운 분야”라고 평한다.

하씨는 점차적으로 가수활동을 줄여나가면서 대학 강단에 설 예정이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앞으로 대중음악 전문대학를 설립하는 꿈을 이루고 싶습니다. 박사 하춘화이기 전에 가수 하춘화로 제 역할을 다해 나갈 겁니다. ”

학위 수여식장에서 언론과의 인터뷰를 마친 하춘화씨는 인터뷰장 구석에서 시종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부친 하종오 옹에게 달려가 박사모를 씌어주었다. 아름다운 부녀의 얼굴엔 함박꽃이 피어났다.

[한국일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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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교만큼 중요한 죽음준비 -김영심 웰다잉전문강사 임신 10달동안 태명에서부터 음식, 음악, 독서, 태담, 동화, 영어와 수학으로 학습태교까지 하고 있다. 태어날 아기를 위해 정성스럽게 최선을 다해 태아교육을 하고 있다. 탄생만큼 중요한 죽음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보건소나 노인대학 강의시 죽음준비를 하고 계신가요?라고 물으면 “나는 죽음준비 다 해놓았어요.”라고 대답을 하시는 분이 계신다. 어떻게 하셨느냐?고 물으니 윤달이 있어서 수의를 해 놓았고 영정사진도 찍었다고 하신다. 결국 수의와 영정사진만이 죽음준비를 대신하고 있다. 죽음준비 강의 후에 ‘내가 죽는다는 것은 생각을 안 해봤는데 죽는다고 생각하니 서글프다’ ‘죽음에 대해 막연히 두려웠는데 오늘 강의를 듣고 나니 오히려 편안해지네요.’ ‘사는동안 잘살고 죽음도 잘 받아 들여야겠어요.’ ‘확 깨게 만들어 주셔서 감사해요’ ‘집에 가서 자식들하고 나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네요’ ‘이런 강의 처음 들었어요’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준비해야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어 좋은 시간이었어요.’ 등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셔서 감사하고 있다. 처음에는 학장님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죽음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라며 못을 박으며 ‘신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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