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으면 100명… 어떻게 죽였는지 판단 어려워 ●세계적인 고고학자 L 울리는 1920년대에 이라크 남부 고대유적 우르에서 4500여 년 전의 왕비로 추정되는 푸아비의 무덤을 발굴했다. 무덤에는 10명의 여인이 순장(殉葬)돼 있었다. 그 중 한 여인은 황금이 장식된 11현 수금(竪琴·하프의 일종)의 줄에 손이 닿아 있었다. 울리는 훗날 “순장된 여인은 죽어서까지 왕비를 위해 수금을 타려고 했는지 모르겠다”고 회상했다. 최근 경남 창녕에서도 가야계로 추정되는 순장(殉葬)당한 사람의 인골이 발굴됐다. 그는 금제 귀고리를 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무덤에서 금제 장식품이 나오면 지배층의 무덤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한상 대전대교수(고고학)는 “고고학적 발굴 결과로 볼 때 이런 생각은 오해”라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서기 6세기 이후 농민층의 무덤에서도 금 귀고리가 적지 않게 나온다. 또한 신라 무덤인 경남 양산 부부총 등에서도 순장된 사람이 금으로 도금한(금동) 귀고리를 하고 있었다. 고고학계는 “수식이 그리 화려하지 않은 금 제품은 신분의 차이라기보다는 경제력의 차이로 보는 게 낫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1600년전 무덤인 경북 경산 임당 E3-8호분에서는 금동관을 지닌 채 순장된 사람도 있어서 논란거리다. 무덤의 주인공은 치아를 채 다 갈기도 전에 죽어서 성징(性徵)조차 제대로 나타나지 않은 유아였다. 나무틀(목곽·木槨)로 만든 주인공의 무덤 바로 위로 돌을 잘 깔고 다시 나무로 관(목관·木棺)을 놓았는데, 이 관 안에 골반뼈 주변에 금동관을 지닌 나이 많은 여인이 묻혀 있었다. 금동관은 전형적인 신라 것이었다. 신라 금동관은 생전에 소유했던 사람이 쓰고 있거나, 아니면 몸 주변에 고이 간직한 채 묻히는 게 ‘정석’이다. 만약 금동관이 어린아이 것이었다면, 금동관은 아이를 묻은 목곽 안에 있어야 했다. 여인이 무덤의 주인공이고 어린아이가 순장된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여인과 어린아이의 묻힌 위치가 바뀌어야 옳다. 목곽은 신라 지배층의 상징적인 무덤 형식이기 때문이다. 순장된 여인이 최고 지배층의 상징인 금동관을 지닐 정도로 신분이 높았다고 생각하기도 힘들다. 순장은 이처럼 동서양을 막론하고 있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2000여 년 전 부여의 기록이 가장 오래됐다. ‘후한서 동이열전 부여’에 따르면 “사람을 죽여 순장을 하는데 많으면 백 명 가량이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순장되는 사람은 어떻게 죽였을까? 외국에서는 순장된 사람의 사인을 분석할 때 뼈에 칼의 흔적 등을 참조해서 몸을 벴는지 등을 판단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토양에 산성이 강해서 뼈의 부식이 심하기 때문에 이 같은 판단이 어려울 때가 많다. 이주헌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은 “순장된 인골을 50여 구 정도 발굴했는데 뼈에 칼자국이 있거나 목이 떨어져 나간 것은 찾은 적이 없다”고 했다. 일부 학자들은 약물을 사용해 죽였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구체적인 근거가 제시된 적은 없다. 순장된 사람을 묻는 곳도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신라나 함안(아라가야), 김해(금관가야) 등에서는 대개 같은 무덤방 안에 묻지만, 고령(대가야)은 무덤 주인공 주변으로 순장된 사람들의 무덤방을 따로 만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