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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룡목사의 삶과 신앙을 재조명하며

김경재 목사의 추모글

 
▲前 크리스챤아카데미 소장 김경재 교수. ⓒ크리스천투데이 DB
여해 강원용 목사(1917-2006)가 타계했다. 기독교계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한 큰 정신적 지도자가 소천함으로 한 시대가 막을 내린 사건이기도 하다. 일간신문과 라디오 및 TV에서도 고인의 생애가 갖는 현대사적 의미를 조명하고, 각계에서 조의를 표했다.

이 글에서는 적당한 거리에서 좀 더 내면적 이야기, 곧 그리스도인으로서 강원용 목사는 누구이며, 왜 그러한 진보 개혁적 삶을 살고 갔는지 조명해 보려 한다. 큰 산을 멀리서만 보면 산의 윤곽만 보이고, 너무 가까이서 보면 나무숲에 가려 산세의 전모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농촌 산골마을 야학과 교회개척에 열심하던 젊은 기독청년

강원용 목사는 1917년 함경남도 이원군 남송면 ‘다보골’에서 유교 가풍의 가정에서 종손으로 태어났다. 소년 강원용을 기준으로 4대가 함께 모여 생활하는 대가족 중심의 농촌 화전민 촌에서 15세까지 유소년 시절을 보냈다. 아버님 이름은 강호연(姜浩然)씨이며 강직한 성격과 가부장적인 유교적 가치관에 의해 가솔을 이끌어간 분이다. 어머니는 염효성(廉曉星)씨로서 자애로움과 정이 많은 성품이셨다. 강원용 목사는 아버지의 강직한 성품과 어머니의 예능적 감수성이 풍부한 성품을 물려받았다. 그리하여 강 목사의 성격에는 지성과 감성, 결단력과 감수성, 카리스마적 기질과 휴머니즘적 인간애가 공존하는 성품을 가지게 된 것이다.

강 목사가 기독교 신앙을 접하게 된 계기 중 두 가지 사건이 중요하다. 강 목사의 외삼촌 염쾌석은 함흥고보를 졸업하고 교편을 잡고 있던 교사였다. 톨스토이와 일본의 빈민구제 선교자 가가와 도요히꼬(하천풍언)를 좋아했던 이 분은 강원용에게 성경과 위 두 사람의 책을 소개해 주었는데, 이것이 그 중 한 가지다.

강원용은 15세 때(1932)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증조부와 조부가 세상을 뜨신 후 강원용의 아버님은 재산을 정리하여 만주 간도지역 한인촌 마을로 이주하여 일부 농토를 마련하고, 차량 한 대를 구입하여 화물운송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마적단의 습격을 받아 재산을 잃고 실의에 빠져 한두 해 동안 가정에 돌아오지를 않았다. 강원용은 본의 아니게 소년가장이 되어 대가족을 먹여 살리는 고된 노동을 감당했다.

함경도 산골에서 고된 농사일에 종사하면서도 청년 강원용은 인생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존재 의미에 대한 물음과, 일본 식민지 통치에 시달리는 민족의 비참한 현실을 절감하면서 늘 고민하였다. 아들의 고민을 잘 알고 지켜보던 자애로운 어머니 염효성씨는 가정 어른과 상의 없이 농촌에서 유일한 재산과 다름없는 소를 팔아 학비를 마련했다. 그리고서 아들 강원용이 공부하여 큰 뜻을 펴도록 격려하고 그를 만주 간도 용정으로 떠나 보낸다. 한국 기독교 지도자 거목 강원용이 있기까지 그 뒤엔 두 사람의 헌신적 여성이 있으니, 한 분은 어머니 염효성이요 다른 한 분은 강 목사의 아내인 겸손한 반려자 김명주 사모다.

만주 간도 땅 용정엔 캐나다 선교부와 간도 명동촌의 교회 지도자 김학연 등이 주동이 되어 세우고 키워나간 기독교학교 은진중학교가 있었다. 강원용은 은진중학교에 들어가서 당시 성경교사로 부임한 장공 김재준 목사를 만나 제2의 인생의 길을 시작하게 된다. 한국 기독교 교회사에서 함경도지방과 만주 간도지방을 중심으로 한 캐나다 선교부의 공헌은 재조명받아야 한다. 평양을 중심으로 한 관서지방 못지 않게 함경도와 간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부지역에서 김학연, 김재준, 문재린, 강원용, 문익환, 문동환, 안병무, 윤동주, 이상철 등 큰 인물이 배출되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캐나다 선교부의 선교정책이 큰 영향을 끼쳤다.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기독교 신앙, 교회사랑 나라사랑을 하나로 생각하는 믿음, 평신도지도자를 존경하고 여성의 지도력을 키워낸 열린 신앙이 거기엔 숨 쉬고 있었다.

강원용은 은진중학교에서 평생 사부로 섬기는 장공 김재준 목사를 만나 제2의 전기를 맞게 된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강원용이 지녔던 율법주의적 기독교 신앙의 억압에서 벗어나서, 복음의 본질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어 사랑과 정의와 봉사와 평화를 위해 사는 ‘자유인이 되는 은혜의 사건’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강원용은 평생 그 복음을 위하여 살게 된다. 강원용은 은진중학교 시절 시골 어린이들의 교육과 교회학교 전도와 애국계몽운동에 온 힘을 쏟았다. 김재준은 강원용의 부친에게 한문을 섞어 쓴 명문 편지를 보내 아들을 일본으로 유학 보내도록 설득한다. 완강하였던 보수적 유교인 강원용의 부친은 김재준 목사가 한문 붓글씨로 쓴 편지를 받고서 “이런 목사도 세상에 계시느냐”라고 감탄하면서 아들 강원용이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 큰 인물로 쓰임받도록 유교적 가치관의 가족 울타리에서 놓아주게 된다.

조국의 분단과 동족상잔의 6.25, 그리고 강원용의 삶과 학문수업

1938년 청년 강원용은 일본 청산학원에 유학하러 일본으로 건너갔고, 청산학원 신학부에서 신학공부를 하기 위해 명치학원 영문학부에 학적을 두게 된다. 그러나 시대는 일본군국주의의 최후발악 단계여서, 젊은 학생들을 징용으로 끌어가던 시기였다. 강원용은 군국주의일본군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간도 용정으로 피신하고, 북만주 한국인 개척부락 마창툰과 개산툰 등지에서 주일학교와 야학을 통한 계몽활동과 개혁운동을 하다가 검거되었다. 1940년에 결혼한 아내가 복막염으로 고생을 하였다. 강원용은 회령경찰서에 사상범 죄목으로 체포, 수감되어 가장 비인간적인 고문과 구속심문을 받게 된다.

해방이 되자(1945) 곧 남하하여 기독학생운동에 뛰어들지만, 해방정국에서 벌어진 비참한 좌우 이념 대결과 비인간적 살육비방을 목도하고 정치가들의 정권야욕에 절망하고, 남북 민족의 분단을 막으려는 김구, 김규식, 여운형 등의 정치운동에 기독학생회 대표자로서 활동하게 된다.

강원용은 남하하던 해(1945) 청년지도자였을 뿐, 아직 목사가 아니었다. 분단의 비극으로 인해 남쪽으로 내려온 뜻 있는 청년들을 ‘선린공동체’로 결집시키고, 지금 경동교회 터에서 최소한의 숙식생활을 하면서 주일학교와 학생선교에 힘쓰며 경동교회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강원용은 김재준 목사가 이끌던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하여 졸업하였고(1948), 한국기독교연연합회 청년학생부간사와 KSCF 총무, 그리고 한국교회청년연합회 총무로서 기독교청년학생운동에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게 된다.

목사안수를 받은(1949) 바로 다음해 6.25 동란이 터지자, 강원용은 폐허가 된 조국의 현실에서 민족을 살리기 위한 기독교의 역할이 무엇인지 찾고 더 중요한 지도자로서 훈련 받기 위해, 김재준의 추천을 받아 캐나다와 미국에서 더 깊은 연구를 하게 된다(1953-1957). 특히 미국 유니온신학교에서 당시 세계적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와 폴틸리히 교수의 강의를 들음으로써, 강원용은 귀국 후 40년 가까이 마르지 않는 깊이 있는 설교와 강연, 그리고 ‘한국 크리스챤아카데미’를 창설하고 이끌고 간 지성적 능력을 갖추게 된다.

강원용의 신학적 노선은 진보적이면서도 기독교 정통신학의 핵심을 놓지 않는 라인홀드 니버의 ‘크리스천 리얼리즘’(Christian Realism) 입장을 한국적 상황에서 이어받고, 폴 틸리히의 은총의 신학과 복음의 역설적 진리관에 영향받았다.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말씀이 육신을 이루어 성육하시고, 십자가의 대속적 사랑인 자기 희생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기본 신앙신조를 바탕에 깔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도피적인 타계주의와 역사비관주의를 극복하고 역사에 대한 책임적 참여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동시에 크리스천 리얼리즘은 인간의 힘으로 땅 위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다는 소박한 낙관주의와 인본주의를 반대한다. 여기에서 강원용 목사 신앙의 모토라고 할 수 있는 유명한 말 “Between and Beyond”라는 원리가 나온다. 양 극단을 극복하고, 양 극단을 동시에 넘어서는 제3의 길을 항상 찾아가려는 순례자로서 개혁정신, 진보정신이 나온다.

한국크리스챤 아카데미운동과 교회연합운동 및 종교간 대화운동

한림대학교 석좌교수였고 『여해 강원용의 삶과 사상』(종로서적, 1995)을 저술한 바 있는 고범서 박사는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특성으로 다음의 다섯 가지를 들었다. (i)갈등 속에서의 결단력 (ii)종합적인 지성 (iii)사람을 볼 수 있는 눈 (iv)감성과 이성의 조화 (v)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개방성이 그것이다. 강원용 목사는 위 다섯 가지 필수조건을 모두 갖춘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그는 늘 보통 사람보다도 약 30년 앞을 내다 볼 줄 알았다.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중앙위원들을 역임하면서 세계교회 주류의 흐름과 장단점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경동교회 담임목사와 한국 기독교계 안에서의 지도력을 넘어서서 ‘한국 크리스챤아카데미’를 독일교회의 지원을 받아 순수 민간차원에서 설립하였다(1965).

그 결과 한국사회에서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예술, 매스컴, 여성, 노동, 종교, 청년 등 각종 분야에서 대두되는 모든 갈등 문제에 대해 ‘대화와 연구와 공동해결모색’이라는 목표를 내걸고, 한국 지성인들을 동원하고 중간 집단을 훈련시켜 사회에 배출하였다. 한국의 노동운동, 시민운동, 여성운동, 민주인권운동, 생태환경운동사에서 크리스챤아카데미의 공헌을 말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크리스챤아카데미 이념의 밑바닥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현실 속에 구현시킨다는 ‘인간화’ 정신과, 극단의 대결이나 독단독선주의를 거절하고 대화를 통한 상생의 길을 모색한다는 기독교의 ‘화해의 정신’이 깔려 있다. 강원용 목사가 1965년부터 시작한 종교 간의 대화모임도 그러한 정신에서 시작한 것이다.

강원용 목사는 한국 기독교계 지도자들에게 ‘예수의 광야 시험 3가지’를 늘 기억하고 시험에 들지 말 것을 경고했다. 물질과 경제제일주의 맘모니즘, 좋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잠시 수단으로써 악한 권력과 결탁하고 영혼을 팔아먹는 권력 숭배, 그리고 거룩한 종교 영성을 빙자한 영적 명예욕과 업적주의가 그것이다. 예수의 광야 시험은 옛날에 있었던 이야기가 아니고 모든 시대 모든 지도자에게 임하는 시험임을 강조했다.

강원용 목사는 한국 현대기독교사에서, 그리고 한국 사회사에서 큰 지도자임을 그 자신의 삶과 신앙고백으로 드러내고 간 분이다. 남은 과업은 남은 자들의 몫이다. 그에게도 하나님 보시기엔 죄도 있고 과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부정적 평가는 하나님이 하실 일이며, 강원용 목사의 소천에 즈음하여 우리가 취할 자세는 우리는 어떻게 살았는가, 우리교회의 모습은 바른 복음적 모습인가를 성찰하는 일일 것이다. 한국 기독교계는 한 거목을 잃었지만, 그의 신앙 열정을 살려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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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교만큼 중요한 죽음준비 -김영심 웰다잉전문강사 임신 10달동안 태명에서부터 음식, 음악, 독서, 태담, 동화, 영어와 수학으로 학습태교까지 하고 있다. 태어날 아기를 위해 정성스럽게 최선을 다해 태아교육을 하고 있다. 탄생만큼 중요한 죽음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보건소나 노인대학 강의시 죽음준비를 하고 계신가요?라고 물으면 “나는 죽음준비 다 해놓았어요.”라고 대답을 하시는 분이 계신다. 어떻게 하셨느냐?고 물으니 윤달이 있어서 수의를 해 놓았고 영정사진도 찍었다고 하신다. 결국 수의와 영정사진만이 죽음준비를 대신하고 있다. 죽음준비 강의 후에 ‘내가 죽는다는 것은 생각을 안 해봤는데 죽는다고 생각하니 서글프다’ ‘죽음에 대해 막연히 두려웠는데 오늘 강의를 듣고 나니 오히려 편안해지네요.’ ‘사는동안 잘살고 죽음도 잘 받아 들여야겠어요.’ ‘확 깨게 만들어 주셔서 감사해요’ ‘집에 가서 자식들하고 나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네요’ ‘이런 강의 처음 들었어요’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준비해야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어 좋은 시간이었어요.’ 등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셔서 감사하고 있다. 처음에는 학장님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죽음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라며 못을 박으며 ‘신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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