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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역사 기행

 
- 부산에서 바라 보이는 섬 대마도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그 중 친근하게 느껴지는 땅이 있다. 대마도(對馬島)이다. 맑은 날 부산사람들이 육안으로 볼 수 있고, 대마도 한국전망대에서 우리 핸드폰의 안테나가 씩씩하게 뻗는 곳, 제주도의 반보다 조금 작은 섬인 이대마도는 우리 역사 속에서 미움과 사랑이 짙게 묻어있다. 나는 이 섬에 가고 싶었다. 한일(韓日)간에 독도문제가 터질 때마다 더 나는 이 섬을 보고 싶었다.

태풍이 8월3일 오전 일본열도를 지나갔음을 확인하고 예정시간보다 늦게 대마도를 향해 출발하였다. 대마도는 정말 가까웠다. 쾌속선으로 1시간 남짓 가더니 고구마처럼 기다랗게 생긴 섬이 보인다. 놀라웠다 .이런 곳이 왜 우리 땅이 안 되었나? 일본에서 제일 가깝다는 후쿠오카와는 147km이다. 49km정도 떨어진 부산 보다 거의100km가 더 먼데…….

우리가 도착한 곳은 대마도의 소재지 이즈하라(嚴原)항구이다. 울릉도의 도동항같이 산을 병풍처럼 둘러친 바다사이에 겨우 자리 잡은 모양새이다. 10여 평짜리 2층 건물에서 출입국심사를 한다. 200명 정도 되는 입국자는 거의 전부 한국관광객이다. 그래서 그런지 공무원들도 간간히 한국어로 말한다.

대마도는 큰 섬과 작은 섬 109개로 이루어졌다. 300m 이상의 높은 산이 바다에 바로 접해져 파도와 깎아지른 절벽이 마주친다. 모래사장과 농사질만한 땅은 보이지 않는다. 대마도근해의 급한 해류ㆍ태풍과 같은 계절풍ㆍ굴곡 많은 리아스식 해안이 노략질하는 왜구들에게는 천연의 요새였을 것이다. 길도 좁은 산길이다. 도로에서 차가 마주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그저 기우다. 비껴 가기위해 100m는 족히 되는 후진도 그들은 전진만큼 잘한다.

대마도는 살아가기 위해서 일본과 조선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생존한다. 때로는 노략질ㆍ장사꾼ㆍ외교가로 카멜레온처럼 살아왔다. 생존을 위한 그들의 역사는 우리에게 그대로 역사 속에서 투영된다.
 
- 학봉 김성일 선생의 비
여류역사가 이훈(李薰)이 쓴「대마도, 역사에 따라가다.」라는 책에서 읽은 대마도와 우리나라와의 관계를 적어본다. 대마도는 백제와 연합한 금강하구(白江)전투에서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 패퇴한 뒤 대마도에 신라를 경계하는 백제식 산성을 쌓기 시작으로 우리나라와 역사 속에서 공식적으로 마주한다.

그 후 여몽연합군(麗蒙聯合軍)의 대마도칩입, 왜구들의 강원ㆍ삼남(三南)에 155차례의 노략질과 이에 대한 최영ㆍ이성계ㆍ박위의 토벌, 조선 세종때 이종무의 정벌과 경상도(慶尙道)로의 편입, 일본 무로마치(室町)막부의 항의와 속주(屬州)화 철회, 조선과 평화로운 대외관계유지, 임진왜란시 병참기지화ㆍ제1군으로 참가, 외교관계회복으로 12차례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 초빙교섭 및 막부의 대조선 외교대행, 그리고 1871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단행으로 나까사키현(長崎)에 편입하여 대마도의 독자성이나 정체성은 상실된다.
 
- 소오 요시토시의 묘비
요약해서 말하면 대마도는 무역관계가 단절되어 살기어려우면 해적질이나 노략질을 하였고, 이종무장군(李從茂將軍)의 정벌이후 평화관계가유지될때는 조일(朝日)간에 외교관계 대행권한으로 양국으로부터 재정원조ㆍ장사 등의 특혜를 얻어 살아온 역사이다.

역사민속사료관(歷史民俗史料館)입구에 조선통신사를 맞이했던 이즈하라성문은 아직도 고려문(高麗門)으로 불리고 있다.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즈하라항구의 모습이 한눈에 보이는 언덕기슭에 자리 잡은 세잔지(西山寺)가 있다. 이곳은 조선통신사가 머물렀던 절로 임진왜란전후 대조선 외교승 겐소(玄蘇)스님 부도와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선생의 비가 나란히 서있다. 두 사람은 어떤 관계였을까?
 
- 덕혜옹주의 결혼기념비
아마 두 사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정복욕을 걱정 했을 것이다. 당시 대마도주 소오 요시토시(宗義智)와 겐소는 양국간의 전쟁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했던 흔적이 보인다. 전쟁이 나면 대마도는 조선으로부터의 생명 줄인 모든 기득권이 끊기기 때문이다. 김성일도 히데요시의 풍모에 빗대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고했지만 당시 백성들의 생활이 몹시 어려워 전쟁을 대비하기위해 물자와 인력을 동원하면 정권이 붕괴될 정도로 민심이 돌아설 것이라는 염려 때문에 사실과 다르게 보고했다는 해석이 있다.

역사는 이들의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히데요시는 현소와 대마도주에게 대마도사람 전체에 해당하는 5000명의 징집과 제1군으로 출병할 것을 지시하고 제1군 총사령관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의 딸인 마리아와 정략결혼 시킨다. 김성일은 목숨을 걸고 의병활동과 진주성싸움에서 일본군과 사투를 벌인다. 전쟁후 대마도가 무척 어려웠던 것은 불문가지이다.
 
- 수직왜인에게 내린 관직임명장인 고신
역사민속관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역대 대마도주와 그가족이 묻혀있는 묘역인 반쇼인(万松院)이 있다. 묘비가 유난히 큰 것이 있는가하면 아주 초라한 것도 있다 묘비입구쪽에 자리 잡은 임진왜란 당시의 대마도주 소오 요시토시의 묘비는 그의 활약에 비해 아주 작고 보잘 것없어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보는 것 같다.

대마도는 우리에게 아픈 패배자로도 기록한 상처가 있다. 덕혜(德惠)옹주의 결혼기념비와 최익현(崔益鉉) 선생의 추모비이다. 식민지시대 대한제국의 마지막 왕녀 덕혜옹주를 과거 대마도주 소우 타케유기(宗武志)백작과 결혼시켰다. 황족도 아닌 대마도주를 왕녀의 배우자로 선택했다는 것은 한 민족의 자존심을 손상시키는 일이다. 슈센지(修善寺)절문을 들어가면 오른쪽에 유학자 최익현 선생의 비가있다. 의병을 일으켰다가 잡혀 징역 3년을 받고 대마도로 유배 되여 단식(斷食)끝에 순국하였다. 백제인 이 세웠다는 이절에 나흘간 시신을 안치했다가 부산으로 이송했다고 한다. 우리는 이 기념비앞에서 절을 올리며 선생의 인품과 우국충정(憂國衷情)을 기렸다.

대마도에도 박물관과 같은 성격의 역사민속사료관이 있다. 20폄 남짓 되는 아주 작은 공간이다. 조선통신사를 수행하는 대마도주와 수행원들의 행렬을 그린 그림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한마디로 대마도 역사의 전부이다. 준비 1년을 포함하여 3년 정도 걸리는 행사였다. 400~500명되는 통신사 사절들을 에도(江戶)까지 왕복안내하고 귀국할 때도 뱃길안전을 위해 조선까지 수행했다.

그림 속에서 우리사신들이 융숭한 대접을 받은 느낌이 베여 있다. 당시 일본에 머물렀던 영국무역관장 리처드 콕스는 「조선통신사들은 왕족과 같은 환대를 받았다」고 기술했을 정도이다. 매년 8월에 이 섬의 축제 아리랑 마찌리때도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재연한다. 들어간 지 10분도 안되었는데 우리 안내원이 볼 것이 없다며 그냥 나가자고 재촉한다.
 
- 아리랑 마찌리 행렬모습
그동안 수십 차례 이곳을 온 그로서는 무엇인가 불만이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말로는 얼마전에도 게시된 조선왕실의 대마도 수직왜인(受職倭人)에게 주는 관직임명장인 고신(告身)을 떼고 다른 것을 걸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동안 대마도가 정치적으로 조선에 예속되었다는 증거로 자주 원용되고 이곳을 찾은 많은 한국관광객의 각별한 관심을 보였던 것이 그들에겐 몹시 불편했던 모양이다.

대마도는 우리와 인연이 없다면 딱히 볼 것이 없는 평범한 섬에 불과하다. 그래도 하나더 의미를 부여하자면 깨끗한 바다ㆍ맑은 공기ㆍ빽빽이 들어선 삼나무 숲이다. 대마도에서 가장 높은 해발519m의 시라타케산을 등산하면서 「우리에게는 아카시아로 조림하게하고 자기들은 삼나무로 조림을 했다」는 비아냥거림이 우리 일행 중에서 자연스럽게 나왔다. 삼나무 숲의 재산가치가 전 일본을 사고 남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잘 가꾸어졌다.

부산으로 돌아오는 선상에서 마음이 착잡했다. 우리는 일본을 너무 경시해왔다. 과거 1500년 전 우리문화를 전해주었던 백제시대의 그런나라로만 생각한다. 외교가였던 서현섭의 「일본은 있다」를 읽으면서 「강한 나라는 다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은 8세기이후 중국의 선진문명을 우리보다 더 적극적으로 받아드렸다.

그러나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종래의 유학자들이 당시 선진국인 난학(蘭學ㆍ네덜란드학)전문가로 변신하여 각종 국방ㆍ군사ㆍ무기에 관한 책을 수입하여 공부하였으며, 얼마후 세계의 중심이 영미라는 것을 알자, 네덜란드어로 영어를 읽을 수없다는 것을 알고, 다시 헌신짝처럼 버리며 영어열풍에 매달린다. 일본 근대화의 스승으로 존경받는 후쿠자와(福澤諭吉)가 그런 사람이다.

우리는 통신사로 12차례 장기간 여행했지만 일본의 어느 것 하나 배우려 들지 않았다. 일본 측 기록을 보면 일본인들이 휘호를 받기위해 내미는 종이에 조선문사들은 종이가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문진을 놓는 대신 발뒤끔치로 밟고 냅다 휘갈겨 썼다 고한다. 오로지 중국의 완전무결한 복사판인 소중화(小中華)만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우리 선조들이다.

대마도는 조선과 일본의 국경의 섬이다.
양쪽에 속한 관계였다고 할 수있다.결국 힘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대마도를 확실하게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임란후에 반성을 하여 대대적인 혁신(革新)을 했거나 중국이나 일본처럼 새로운 정권이 들어와 개방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정책만 펼쳐더라도 늦지 않았는데...., 오히려 현지배층 위주의 예학(禮學)만 강조하여 썩은 정권만 연장시켜 200년이 지나 국가를 통째로 빼앗기는 수모를 겪은 것이다.

한가지 더 생각하면 우리는 너무 문신(文臣)위주의 사회였다고 생각된다. 조선 초기부터 우리의 섬조차도 국방이나 정권의 불안해소ㆍ치안의 어려움 때문에 사람도 살지 못 하게하는 공도(空島)정책을 펴쓰니...하물며 대마도는?

조선말기에 그린 지도에는 어김없이 대마도가 여전히 조선영토로 기록되어있다. 현실은 그렇지 못하지만 우리 마음속에 고구려와 발해의 옛 땅인 만주ㆍ간도와 더불어 대마도도 우리가 회복하고 싶은 땅이다.
역사는 반복한다. 늘 깨어 있어야한다. 그래야만 최소한 지금의 우리 것이라도 지킬 수 있고, 그 이상의 희망도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임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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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교만큼 중요한 죽음준비 -김영심 웰다잉전문강사 임신 10달동안 태명에서부터 음식, 음악, 독서, 태담, 동화, 영어와 수학으로 학습태교까지 하고 있다. 태어날 아기를 위해 정성스럽게 최선을 다해 태아교육을 하고 있다. 탄생만큼 중요한 죽음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보건소나 노인대학 강의시 죽음준비를 하고 계신가요?라고 물으면 “나는 죽음준비 다 해놓았어요.”라고 대답을 하시는 분이 계신다. 어떻게 하셨느냐?고 물으니 윤달이 있어서 수의를 해 놓았고 영정사진도 찍었다고 하신다. 결국 수의와 영정사진만이 죽음준비를 대신하고 있다. 죽음준비 강의 후에 ‘내가 죽는다는 것은 생각을 안 해봤는데 죽는다고 생각하니 서글프다’ ‘죽음에 대해 막연히 두려웠는데 오늘 강의를 듣고 나니 오히려 편안해지네요.’ ‘사는동안 잘살고 죽음도 잘 받아 들여야겠어요.’ ‘확 깨게 만들어 주셔서 감사해요’ ‘집에 가서 자식들하고 나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네요’ ‘이런 강의 처음 들었어요’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준비해야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어 좋은 시간이었어요.’ 등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셔서 감사하고 있다. 처음에는 학장님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죽음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라며 못을 박으며 ‘신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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