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장례메이크업 개척한 이종란 협회 회장 ▶"누구나 고운 모습으로 생을 마감하고 싶어 하잖아요. 유가족도 고인의 모습이 평화로우면 "아, 좋은 곳으로 가셨겠구나"하고 위안을 얻고요. 장례메이크업은 고인의 존엄성을 지키고, 남은 이들을 달래는 치유제 같다고 생각해요." 이종란(50) 장례메이크업협회 회장은 옅은 핑크색 원피스를 입고, 화사하게 화장한 모습으로 기자를 맞았다. 28년간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활동하면서 몸에 밴 습관이다. 국내 메이크업 아티스트 1세대로, 내로라하는 유명 연예인들 광고 메이크업을 했던 그는 지금 사망자를 아름다운 모습으로 떠나보내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죽은 사람에게 화장을 해 주는 일은 무섭고 꺼려질 법한데도 이씨는 "사람들을 아름답게 만든다는 점에선 똑같다"고 했다. 서울예대 연극과 출신인 그는 원래 연기 학도였다. 하지만 목이 약해 조금만 연습해도 금세 편도가 부어 오르는 탓에 배우의 꿈을 포기해야 했다.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대신 동료, 선후배 연기자들에게 분장을 해주며 보람을 찾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메이크업이 그의 직업으로 자리 잡아 버렸다. 졸업 후 TV·잡지 광고와 영화·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들 메이크업을 도맡아 했다. 국민 배우 안성기가 "커피는 맥심"이라는 유행어를 만든 TV광고, 탤런트 류시원의 부드러운 이미지가 부각된 "섹시 마일드" 샴푸 광고, 가수 보아의 청순한 모습이 돋보인 "미샤" 화장품 광고 등이 그의 손길을 거쳐 간 대표작들이다. 새벽까지 광고와 드라마 촬영 현장을 옮겨 다니며 유명인 메이크업을 담당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2000년 무렵 이씨의 친척 한 명이 세상을 떠났다. 오랜 투병생활로 고인의 얼굴은 많이 상해 있었다. 가족들이 되도록 생전 모습을 기억하도록 하고 싶어 피부 톤을 살리고 혈색이 돌게 메이크업을 했다. 그게 장례메이크업의 첫 시작이었다. 당시 미국·일본 등에선 이미 장례메이크업이 자리 잡고 있는 상태였다. 호기심이 많았던 이씨는 해외에 견학도 가고, 외국 메이크업아티스트를 통해 조금씩 정보를 수집했다. 피붙이를 치장할 때와는 달리 생판 몰랐던 사람의 시신을 마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부검을 막 마치고 나온 시신은 꿰맨 자국들을 가리느라 진땀을 흘렸고, 냉장 보관됐던 시신은 물기 때문에 화장이 잘 먹지 않아 애를 먹었다. 부패가 진행되거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얼굴이 훼손된 경우엔 생전 사진을 옆에 놓고 얼굴 틀을 떠 훼손 부위를 메우며 작업했다. 어린 아이들, 컨테이너에서 화재로 피부가 타버린 외국인 노동자 시신을 보고 마음이 아파 많이 울기도 했다. 하지만 횟수를 거듭할수록 괴로움이나 두려움보단 보람이 더 커졌다. 자살한 18세 소녀를 천사처럼 하얀 깃털로 얼굴 주변을 장식하고 발그레하게 혈색이 돌게 치장했을 때 아이 엄마는 "꼭 자는 것 같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병으로 오래 고생한 아버지를 떠나 보내며 "이렇게 편안한 아버지 모습, 오랜만에 보네요"라고 인사한 딸도 있었다. 2010년 1월 뜻을 같이하는 메이크업아티스트 20여명을 모아 장례메이크업협회를 설립했다. 각 대학 장례지도학과를 돌아다니며 장례메이크업의 필요성에 대한 강의도 했다. 처음엔 "수의로 덮는데 화장이 왜 필요하냐"고 하던 사람들도 차츰 이씨와 생각을 같이하게 됐다.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회원이 10배 넘게 불어나 200명을 훌쩍 넘겼다. 현재까지 이씨가 담당한 장례메이크업은 200여건. 광고·촬영 메이크업에 후진 양성까지 하는 바쁜 일상이지만, 장례메이크업에 대한 이씨의 애정은 점점 커지고 있다. "결혼식 때 웨딩메이크업을 하는 건 다들 당연하게 생각하잖아요. 고인의 아름다운 최후를 위해 장례메이크업도 우리 장례문화의 일부분으로 자리 잡으면 좋겠어요." [조선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