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자락에 위치한 서울 은평구 진관내동 중골마을. 북한산 의상봉 등산의 기점이 되는 이곳에 오르면 나무숲 사이로 8800평(약 2만9000㎡) 규모의 빈터가 덩그러니 드러난다. 흙이 마구 파헤쳐진 현장 군데군데 서 있는 문인석과 망주석을 보면서 이곳이 한때 누군가의 집단묘지였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폐허처럼 된 이곳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내시(內侍) 집단묘역 중 가장 오래되고 큰 규모로 알려진 이사문공파(李似文公派) 내시 집단묘역 터였다. 하지만 45기의 묘가 자리하고 있던 이 집단묘역은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렸다. 대신 한 조경 사업가에 의해 땅이 완전 갈아엎어졌다. 유골은 모두 화장됐고 후손들은 땅값으로 4억8000만원을 손에 쥐었다. 국내 최대 내시 집단묘역이 민관의 무관심 속에서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인근 백화사 주지승 일법 스님은 “내시 집단묘역이 사라진 것을 한참 뒤에나 알았다”며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곳을 그런 식으로 갈아엎다니…” 하면서 혀를 찼다. 인근에 사는 주민들도 대부분 내시 집단묘역이 사라진 것을 몰랐거나 뒤늦게 알고 놀라워했다. 향토사학자 등에 따르면 조선시대의 관리들은 ‘사패지’라 하여 임금으로부터 땅을 녹으로 받았다. 공을 세운 내시들은 전국에 꽤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내시의 양자들인 후손들은 내시라는 선조대의 역사를 부끄러워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곳 묘역에 안장됐던 김세욱, 박민채, 오준겸, 김성휘 등 내시들은 대부분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에 활동 기록이 남아 있는 인물들이다. 비문에도 여러 역사적 사실들이 남아 있어 내시 인물사 연구와 풍속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였다. 후손들이 쉽게 땅을 처분할 수 있었던 것은 이곳이 지정문화재가 아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일부 주민들은 “마을에 도로가 뚫려 값이 오르자 팔았다는 소문이 있다”고 말했다. 박상진(49) 은평향토사학회 부회장은 “사대부의 묘들은 많이 남아 있으나 내시나 궁녀의 묘들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고 있다”면서 “이들 묘역이 갖는 역사적 가치를 존중해 정부가 강제적으로라도 문화재 지정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
승전관이란 내시 중 왕과 왕비의 명령을 출납한 승전색(承傳色)을 말하는 것으로 내시부의 직제상 정4품 상전(尙傳)이 이를 맡았다. 폐묘된 묘 가운데 비석에 관직이 기록된 이는 모두 15명이다. 그중 최고 관직인 종2품 상선(尙膳)에 오른 이는 임성익(林成翼), 박민채(朴敏采), 김성휘(金成輝), 박황(朴滉), 오준겸(吳浚謙) 등 모두 5인이다. 박상진 은평향토사학회 부회장은 “특히 이들 중 정조조에 봉사했던 박민채의 경우 수차례 공을 세워 왕으로부터 숙마(熟馬:길들일 말), 반숙마(半熟馬), 보검(寶劍), 전지(田地) 등 모두 8번에 걸쳐 상을 받았는데, 이 중 정조 2년(1778)에는 가자(加資:정3품 이상의 당상관 품계에 올림)와 함께 안장을 갖춘 내구마(內廐馬:왕이 타던 사복시의 말) 1필을 면급받고, 노비 4구, 전지 30결을 사급받은 기록이 일성록(日省錄:조선 영조 때 임금의 일기 형식으로 쓰인 조정의 기록)에 보인다”며 “내시 가문 중에서도 대단히 명망 있던 가문이었다”고 설명했다. 묘역에 남아 있던 석물(石物)은 문인석(文人石)이 5쌍, 비석이 5기, 상석(床石)이 20기, 망주석(望柱石)이 9기였다. 내시도 부인과 자녀를 두고 생활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기록도 있었다. 북한산 내시 묘역이 폐묘됨으로써 국내에는 서울 은평구 이말산(莉茉山)에 4기, 강남구 신사동(新寺洞)의 김새신(金璽信) 묘, 노원구 초안산(楚安山)의 상세(尙洗) 승극철(承克哲) 묘, 도봉구 쌍문동 곱산 내시 묘, 경기 남양주, 고양, 양주 지역 일부, 용인의 강석호(姜錫鎬) 묘, 경북 청도의 김씨가(金氏家) 내시 묘 등 일부의 내시 묘만이 남게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