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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0~12월 정황을 담은 ‘정황보고 및 잡보 4권’은 “하얼빈에서의 살인사건으로 입감한 한국인 9명…일거일동에 주의해 특히 야간에는 수시로 간수로 하여금 그 행동을 비밀 정탐케 하는 등 야간경계는 종래의 감독자 외 간수 6명을 배치하던 것을 8명으로 증원해 만일의 위험을 방지하는 데 힘썼다”고 적고 있다. 1910년 1~3월의 정황을 담은 ‘정황보고 및 잡보 5권’은 “사형 확정 후에는 더욱 경계를 엄히 할 필요가 있었으며, 야근간수를 증가시켜 감옥 안팎과 부속관사 부근 일원을 날이 샐 때까지 순찰경비를 시켰다”고 보고했다. 보훈처 관계자는 “이번에 발굴된 자료에는 이미 알려진 내용이 꽤 포함돼 있지만, 그동안 한국 정부가 공식 문서를 통해 관련 자료를 요청했을 때 ‘자료가 없다’고 했던 일본 정부의 답변이 빈말임을 보여준다”며 “이번 자료들도 일본 정부의 협조가 없어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입수했다”고 말했다. 김양 보훈처장은 “철저한 기록문화를 가진 일본의 특성에 미뤄볼 때 일본이 (안 의사의 유해와 관련해) 결정적인 자료를 갖고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며 “안 의사 유해 관련 자료에 대한 일본 정부의 성의 있는 협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