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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조비의 경제학

▶"월급 도둑" 같은 경ㆍ조사비 차라리 "몸"으로 때운다‥
▶결혼식에선 사회 보거나 축가 부르고 장례식에선 끝까지 자리 지키고
▶대기업 기획팀에서 일하는 홍인국 과장(36)은 9월 달력을 보면 한숨부터 나온다. 지뢰밭처럼 곳곳에 표시된 빨간 동그라미 때문이다. 동그라미는 다름아닌 직장 후배나 지인들의 결혼 예정일.찬바람보다 더 빨리 결혼식 청첩장은 어김없이 날아든다.

홍 과장은 경조사를 빠짐없이 챙기는 사람이다. 신입사원 때 부친상을 당해 상부상조의 위대함을 누구보다 잘 안다. 문제는 돈과 시간이다. 경조사 부조금은 당초 예산에는 없다. 아무리 용돈을 아껴 쓴다고 해도 부담이 된다. 경조사가 한꺼번에 몰릴 경우엔 더욱 그렇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상가 등 조사(弔事)야 저녁 시간을 쪼개면 참석할 수 있다. 결혼식 등은 다르다. 이미 선약이 있는 주말로 잡혀진 결혼청첩장이 오면 난감하기 짝이 없다.

전국의 김과장 이대리도 홍 과장과 다르지 않다. "부조금은 월급도둑"이라는 우스갯소리를 실감하는 이들에게 결혼식이 몰리는 가을은 그렇게 흥겨운 계절만은 결코 아니다.

◆부조금 책정에도 비결이 있다

"얼마를 넣어야 할까" 직장인들이 경조사에 참석할 때마다 반복하는 고민이다. 대부분은 경조사비 고유 수열인 "3-5-10(만원)"을 적용한다. 그렇지만 최근엔 부조금 인플레가 심해졌다. 3만원을 넣자니 왠지 쑥스럽다. 그렇다고 5만원,10만원을 넣자니 한 달 생활이 걱정이다.

이런 고민에 대처하는 김과장과 이대리의 방법은 무엇일까. 3년 전 결혼한 대기업 홍보팀 김인효 과장(34)은 USB메모리에 담긴 엑셀파일로 고민을 해결한다. 엑셀파일에는 자신의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과 축의금 액수가 적혀 있다. 대부분 중 · 장년층이 갖고 있는 경조사비 장부와 비슷하다. 다른 점이라면 엑셀파일이라 보관하기도 쉽고,이름 찾기도 편하다는 점.김 과장은 엑셀파일에 적혀 있는 대로 받은 만큼 되돌려준다.

중견기업에 근무하는 박모 대리(31)는 결혼을 앞두고 있다. 그런 만큼 마당발처럼 친구들 결혼식을 챙긴다. 조만간 탈 곗돈이려니 생각하고 축의금도 가능한 한 많이 넣는다. 그렇지만 대리 월급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것이 "장소마다 다르게"다. 호텔 등 돈이 많이 드는 결혼식엔 10만원을 넣기도 한다. 반면 상대적으로 돈이 덜 드는 웨딩홀 결혼식엔 5만원만 낸다. 잘 모르는 회사 동료의 결혼식에는 부서 명의의 공동 축의금을 내는 데 "성의표시"만 한다. 나름대로의 생존 방법이다.

◆돈이 부담된다면…

보험회사에 다니는 윤민호 대리(30)는 친구들 결혼식에 얼마를 낼지 고민하지 않는다. 그는 대학 동아리 노래패 출신이다. 넉살도 좋다. 그러다보니 친구 결혼식의 단골 사회자로 인기다. 축가도 심심치 않게 부른다. 굳이 부조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윤 대리는 "결혼을 준비하는 신혼부부들은 사회자나 축가를 불러줄 사람을 구하는 데 생각보다 골치 아파한다"며 "선뜻 축가를 불러주겠다고 하면 친구들이 더 고마워한다"고 말했다.

은행에서 일하는 한은혜 대리(35)는 축의금 대신 자신이 직접 포장한 선물을 전달한다. 비싼 것도 아니다. 젖병소독기 공기청정기 조명기기 등 신혼부부들이 꼭 필요로 하는 물건들이다. 한 대리가 이런 아이디어를 낸 것은 자신의 경험에서다. 결혼식을 치르고 보니 누가 축의금을 얼마 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대신 요긴하게 필요한 선물을 사준 친구들은 물건을 사용할 때마다 생각났다. 그래서 그 뒤로는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

◆경사는 못 가도 조사는 반드시 챙긴다

중견기업에 근무하는 황선호 과장(35).직장생활 11년차인 그에겐 자신만의 경조사 원칙이 있다. 결혼식은 못 챙겨도 장례식은 반드시 챙긴다. 바쁜 일이 생기면 새벽에라도 반드시 상가(喪家)를 찾는다. 부의금 액수도 축의금보다 더 많이 책정한다. 황 과장은 "오랜기간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는 결혼과 달리 조사는 대부분 갑작스럽고 경황없이 찾아오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부조가 될 수 있다"고 전했다.

은행에 다니는 최우영 과장(35)도 경사보다 조사를 더 챙긴다. 경사에는 "돈"을,조사에는 "몸"을 실어야 한다는 게 그의 철칙이다. 결혼식이나 돌잔치에는 돈만 보내면 가장 환영받고,지인이 상을 당했을 때는 반드시 참석해 자리를 한동안 지켜주는 게 도리라고 생각한다. 최 과장은 "어렵거나 힘들 때는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힘이 된다"며 "썰렁한 결혼식장도 그리 좋아보이지 않지만 손님 없는 장례식장은 비참함 그 자체"라고 말했다. [한국경제]
 
◆경조사는 영업의 연결고리

자동차 영업사원인 하민수 대리(33).그에겐 경조사 챙기는 게 주된 일과 중 하나다. 그가 관리하는 고객 등 지인은 1000명.가능하면 이들의 경조사를 파악해 성의를 표시한다. 이를 위해 하 대리는 신문의 부고란은 빠짐없이 챙긴다.

이만한 사람의 경조사를 챙기려면 상당한 돈이 들어간다. 하 대리는 이를 최소화하기 위해 가능한 한 경조사에 직접 참석하려 애쓴다. 고객들도 거래관계,친밀도 등을 따져 4개 그룹으로 나눈다. 이에 맞춰 경조사비도 3만원,5만원,10만원,20만원으로 나눠 낸다. 하 대리는 "진정한 영업은 고객과의 긴밀한 관계 유지"라며 "경조사도 이런 차원에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김모 부장(46)도 상가를 빼놓치 않고 챙기는 스타일이다. 김 부장은 상가에 갈 때 나름대로 원칙이 있다. 다름아닌 발인 바로 전날,그것도 가급적 늦은 시간에 상가를 찾는 것이다. 부친상이나 모친상을 당하면 상주는 정신이 없다. 게다가 문상객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누가 언제왔는지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김 부장은 "문상객 대부분이 다녀간 늦은 시간에 상가를 찾으면 상주는 문상 왔다는 걸 뚜렷이 기억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인간관계를 좌우하기도

중견 건설회사에 다니는 정찬영 대리(33)의 별명은 "차명계좌"다. 경조사를 빠짐없이 챙기다 보니 주변 선후배 동료들이 그에게 "부조금을 대신 내달라"며 통장번호를 불러 달라는 얘기를 자주 하기 때문이다. 대신 내준 부조금은 상당수 부실채권이 되지만 정 대리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그도 3년 전까지만 해도 경조사 챙기기가 귀찮기만 했던 "뺀질이"였다. 정 대리가 180도 바뀐 것은 경북 구미에서 주말에 치른 어머니 장례식에 직장 동료들이 한명도 빠짐없이 찾아온 이후부터.그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경조사에 참석하지 않았던 게 너무 후회됐다"고 토로했다.

경조사로 인간관계가 소원해지는 경우도 흔하다. 홍보대행사에서 일하는 진현희 차장(35 · 여)은 일 때문에 고교 동창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날 이후 친구는 만나기만 하면 "결혼식에 왜 안왔느냐"며 서운함을 표시했다. 그리고 1년 뒤 있은 진 차장의 결혼식에 친한 고교 동창 중 그 친구만 오지 않았다. 진 차장은 "임신 9개월째라 참석하지 못한다는 얘기를 간접적으로 들었지만 왠지 복수를 당한 느낌이었다"며 씁쓸해 했다. [한국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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