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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인들의 묘비명과 유언

 
◈“일어나지 못해 미안해”헤밍웨이, 임종 때도 익살
◈버나드 쇼 “우물쭈물 살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걸레스님 중광 “괜히 왔다 간다”
▶시대를 밝힌 ‘큰 별’ 김수환 추기경의 묘비에는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이 없어라”라는 묘비명과 생전의 사목이었던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라는 글귀가 새겨졌다. 인간에 대한 한없는 애정이 삶의 이유였던 추기경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남은 사람은 떠난 사람이 남긴 마지막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무엇을 배울까? 역사 속 위인의 유언과 묘비명을 통해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삶을 ‘팍팍하다’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한 많은 민족정서는 유언이나 묘비명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반면 서양의 묘비명은 예전부터 냉소적이고 재치 있는 형식을 갖추는 것이 일반화돼 있다.
모진 풍파를 겪은 사람일수록 그 재미는 더하다. 100년 가까운 생을 살며 제1, 2차 세계대전을 모두 겪은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1856~1950)는 묘비에 “우물쭈물 살다 내 이럴 줄 알았지(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happen)”라는 엉뚱한 글귀를 새겼다. 글 쓰는 일을 평생 업으로 삼은 사람다운 기발한 재치가 엿보인다. 그러나 재치 있는 말에 마냥 웃을 수만은 없다. 그의 말대로 ‘우물쭈물하다’ 기회를 그냥 놓치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는 인생을 허망하게 날리는 사람들에게 준비하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노인과 바다>로 유명한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는 인간의 비극적 모습을 간결하게 표현하던 자신의 문체 그대로 “일어나지 못해 미안하오(Pardon me for not getting up)”라는 묘비명을 남겼다.

그는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 의용병으로 참가하며 겪은 전쟁의 참혹함과 1928년 아버지의 권총자살 등 파란만장했던 삶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았던 삶을 한마디로 풀어냈다. 이탈리아 극작가 존 게이(1685~1732)는 작품 <거지 오페라(The beggar’s opera)>에서 당시 자유당 내각에 대한 신랄한 풍자를 담아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그는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한 날 선 비판으로도 유명했는데, 그의 풍자적 인생관은 “인생은 농담이야. 모든 것이 그것을 말해주네. 전에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죽어서야 알겠구나(Life is a jest. And all things show it. I thought so once. But I now know it)”라는 묘비명에도 잘 나타나 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던 초기 정치인 중 한 명인 벤자민 프랭클린(1706~1790)은 25세 되던 1731년 자신의 묘비명을 미리 만들어 놓았다. 그의 묘비에는 “출판업자 벤 프랭클린의 시신이 여기 벌레의 먹이로 누워 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니, 늘 새롭고 더 우아한 판으로 개정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20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그의 전기는 꾸준히 개정출판되고 있으니 그의 유언은 곧 현실이 된 셈이다.

◆유언=삶의 작은 미련과 마침표

우리나라에도 재치 있는 말을 남긴 사람이 있다. ‘걸레’ ‘미치광이 중’을 자처하며 삶을 파격으로 일관했던 중광 스님의 묘비명은 “괜히 왔다 간다”다. 권력이나 물질적 풍요를 누렸던 인생이든, 가난에 찌들었던 인생이든 모두 덧없는 것임을 명쾌하게 표현한 문장이다. 이 밖에도 “여기 한 무신론자가 누워있다. 옷은 차려 입었는데 갈 곳이 없구나” “물로 이름을 쓴 한 남자가 여기 누워 있노라(존 키츠)” 등 위트는 있으되 그저 웃으며 지나칠 수 없는 의미를 내포한 묘비명도 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대부분 자신의 인생을 담담하게 정리하거나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미련, 혹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유언을 남겼다. 공산주의의 창시자 칼 마르크스(1818~1983)는 그의 평생동지였던 엥겔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유언이란 평소에 할 말이 없었던 사람이나 하는 것 같네.”

그는 <공산당선언> <철학의 빈곤> <경제학 비판> 등의 저서를 집필하며 세상을 향해 자신의 목소리를 충분히 냈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그의 생각대로 ‘뉴 레프트 운동’은 이후 여성운동·환경운동·인권운동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동양인의 사고를 규정짓는 공자(BC 551~479)는 “지는 꽃잎처럼 현자는 그렇게 가는구나”라는 유언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묘비명은 한 사람의 치열했던 인생 기록이다.
생전에 “사람이 삶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라며 현세주의적 사상을 가졌던 그는 끝내 답을 얻지 못한 미련을 이와 같은 말로 달랬다. 체 게바라(1928~1967)는 1967년 볼리비아 정글에서 총살당할 때 처형을 담당했던 하사관에게 “방아쇠를 당기시오. 당신은 단지 사람 한 명을 죽이는 것뿐이오”라는 말을 남겼다.

시대의 한 기류를 형성한 불같은 혁명가에게도 죽음이란 단지 ‘한 인간의 종말’일 뿐이었던 것이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1827)은 창작활동 중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가장 고통스러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죽음 직전에도 무음(無音)의 고통 속에서 “천국에서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겠지”라며 음악가에게 생명보다 소중한 ‘귀’가 없었던 힘든 삶에 마침표를 찍었다.

72년간 절대권력을 휘두르며 무리한 전쟁을 벌여 경제를 파탄시킨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1638~1715)는 임종 직전 루이 15세에게 “너는 이웃나라와 싸우지 말고 평화를 유지하도록 힘써라. 내가 밟은 길을 따르지 말고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해라. 불행하게도 내가 행하지 못한 일을 네가 해주기 바란다”는 유언을 남겼다.

또 그는 “왜 우느냐? 너는 내가 평생 살 줄 알았느냐?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힘들구나”라는 말도 남겼는데, 죽음은 이처럼 한 사람이 평생 누려온 세속적인 것을 체념하게 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이 운명에 순응한 반면, 죽음에 대한 공포 혹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독설을 남긴 사람도 있다. 프랑스 문학가 볼테르(1694~1778)는 생전에 종교를 부정하는 글을 많이 남겼다.

그는 “20년 이내에 기독교는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죽을 때는 담당 의사에게 “나는 하느님과 인간에게 버림받았소! 나를 살려준다면 내가 가진 재산의 절반을 주겠소. 나는 지옥으로 갈 거요. 아, 하느님!”이라고 부르짖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저서를 인쇄했던 건물은 제네바성경협회의 보관소가 됐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유언과 묘비명은 한(恨)의 정서에 영향을 받지만 정의·철학·수신을 총망라한 ‘종합세트’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도 있다. 대표적인 것은 일제강점기 인물들의 말이다. 안중근(1879~1910)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암살하고 체포된 뒤 아내, 어머니, 천주교 신부 조지프 빌렘(한국이름 홍석구) 등 가족과 지인에게 5개의 유언을 남겼다.

처형 직전에는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중략)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춤추며 만세 부를 것이다”라고 말했다.

◆묘비명은 떠난 자와 남은 자들의 대화

윤봉길(1908~1932) 의사는 1931년 겨울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김구를 만나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1932년 4월29일 상하이(上海) 훙커우공원에서 열린 일제의 상하이 점령 전승기념 행사장 연단에 폭탄을 던진 뒤 체포됐다. 그는 같은해 12월19일 일본 가나자와 육군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는가”라는 질문에 “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므로 하등 말할 바 없다”는 말을 남겼다.

서울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는 독립운동가 조봉암(1898~1959)의 묘비에는 생전의 어록에서 발췌한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나”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예술가들은 삶을 주로 철학적으로 풀어냈다.

서양화가 박수근(1914~1965)은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 시인 조병화(1921~2003)는 “나는 어머님 심부름으로 이 세상에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라는 묘비명을 각각 남겼다. 기업인 중에는 유한양행 창업주인 유일한(1895~1971) 박사의 유언이 잘 알려져 있다.

유언의 큰 틀은 “재산을 공익사업을 위해 기부하고 딸 유재라는 내 묘지 주위의 땅 5,000평을 ‘유한동산’으로 꾸며 아이들이 뛰놀 수 있게 하라”는 것이었는데 유재라 여사도 세상을 떠나기 전 200억 원을 사회에 환원했다. 김수환 추기경이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남긴 것처럼 위인들의 유언과 묘비명은 바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또 다른 화두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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