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 백제의 왕성으로 입지를 굳혀가고 있는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에서 절의 목탑터로 추정되는 유적이 발견됨에 따라 학계의 눈길이 쏠리고 있다. 그동안 한성 백제 지역에서는 당시의 불교유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제에 불교가 전해져 절이 처음으로 세워진 곳이 어디이고, 또 불교가 어떻게 정착할 수 있었는지가 모두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한 변이 10m 남짓한 추정 목탑터는 깊이 3m가량의 네모난 구덩이를 판 다음 내부를 점토와 사질토로 교대로 다지고 다시 그 위에 점성이 적은 모래질 점토를 채웠다. 발굴조사를 벌이고 있는 한신대박물관의 책임조사원인 권오영 교수는 “이런 형태의 축조방법은 사비시대 백제 목탑터 등에서 보이는 것과 같다.”면서 “절에 흔히 쓰이는 연꽃무늬 기와가 나온 것도 백제 목탑터일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유적이 더욱 관심을 끄는 것은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반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기 때문이다.4세기 후반이라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언급된 침류왕 시절 불교 전래 및 사찰 건립 기록과 일치한다. 두 사서는 ‘백제 제15대 침류왕이 즉위한 384년에 호승 마라난타가 동진(東晉)에서 오자 그를 궁중에 두고 공경했으며, 이듬해 새 도읍 한산주(漢山州)에 절을 세우고 열 사람을 뽑아 스님으로 삼았으니 이것이 백제 불교의 시초’라고 적고 있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는 “이 유적이 절의 목탑터로 확인된다면, 왕궁의 내원(內院·부속사찰) 기능을 한 왕실사찰로 사비(부여)의 정림사보다도 격이 높은 것”이라면서 “백제 불교의 호국적 성격으로 볼 때 왕실의 비호와 장려를 받으며 불교의 번창을 이끈 사찰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목탑터가 경우에 따라서는 백제 최초의 사찰일 수도 있을 것”이라면서 “조사가 끝나봐야 알겠지만 지금 나타난 현상만 가지고는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 목탑터가 절의 흔적으로 확인된다면 백제 초기 불교의 발전 양상뿐 아니라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으로 혼선을 빚고 있는 고대사의 진실을 규명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몇몇 일본학자들은 ‘일본 서기’의 기록에 따라 백제가 불교를 받아들인 시기를 침류왕 시절이 아닌 동성왕(재위 479∼501년)으로 한 세기 이상 늦춰잡았다. 뿐만 아니라, 일본 규슈대학의 니시타니 다다시(西谷正) 교수가 대표하는 일군의 학자들은 ‘낙랑군을 떼어내 대수(帶水) 남쪽에 대방군을 설치했다.’는 중국 기록을 근거로 대수를 한강으로 간주하면서,‘풍납토성은 대방군의 치소(治所)’라고 엉뚱한 주장을 펴기도 했다. 풍납토성의 목탑터가 백제 특유의 건축기법으로 조성된 절의 중심 건축물로 밝혀진다면 이런 주장은 완전히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