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세기 신라 왕족과 귀족 등 상류층이 주로 묻혔으리라 추정되는 일대는 2007년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한 이래 다양한 형태의 무덤이 확인됐다.
그 중에서도 최근 발굴조사를 마친 44호 무덤에서는 지금으로부터 1천500년 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신라 공주의 흔적이 드러나 큰 관심을 끌었다.
8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따르면 쪽샘 44호 무덤은 2007년 봉분(封墳·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부분)이 없어지거나 훼손된 폐고분을 조사하던 중 정확한 위치가 파악됐다.
봉분 지름을 계산하면 동서 약 30.8m, 남북 약 23.1m. 신라시대 조성된 무덤 중에서는 '중형급'에 속한다. 그러나 정밀 조사를 시작할 때만 해도 무덤 상태는 좋지 않았다.
정인태 학예연구사는 지난 4일 경주시 서라벌문화회관에서 열린 발굴조사 성과 설명회에서 "초반에는 봉토 일부분이 잘려 나가고 윗부분은 파괴돼 있었다. 발굴하지 않으면 유적이 훼손되겠다 싶었다"고 떠올렸다.
2014년 '쪽샘 유적 발굴관'을 만들고 본격적인 조사에 나선 뒤에도 작업은 만만치 않았다.
무덤에 쌓여 있던 돌무지 길이가 19m, 너비 16m로, 무덤 전체 규모에 비해 크게 조성된 탓이었다. 돌무지를 모두 걷어내는 데만 5t(톤) 트럭 약 198대이 필요한 정도였다.
그러나 어렵게 모습을 드러낸 무덤 안에는 1천500년 전 신라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발굴 당시 무덤의 주인은 금동관을 비롯해 가슴 걸이, 금 드리개, 금 귀걸이, 금·은 팔찌와 반지, 은 허리띠 등 화려한 장신구 36점을 착용한 모습이었다.
신라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인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장신구 형태다.
눈에 띄는 점이 있다면 무덤의 주인이 큰 칼이 아니라 은장으로 된 작은 손 칼을 지닌 점이었다. 장신구 크기가 전반적으로 작은 점에서 여성일 가능성에 무게가 실렸다.
금동관·비단벌레 장식…크기는 작지만 '왕릉급' 무덤에 준한 유물
다른 부장품의 크기도 전반적으로 작은 편이었다. 무덤에서는 한자 '출'(出) 자를 본뜬 듯한 금동관 일부가 출토됐는데, 전체 높이가 23.2㎝로 금령총 금관(27㎝)을 비롯한 다른 금관·금동관보다 작았다.
무덤 주인의 머리맡에 둔 금동 신발 길이 역시 280∼290㎜ 정도로 같은 경주에서 나온 황남대총 남분 출토품(310㎜), 금관총 출토품(330㎜)과 차이를 보였다.
심현철 연구원은 "발굴 과정에서 각종 부장품이 출토됐을 때는 무덤 주인의 키를 150㎝ 정도로 내다봤지만, 정확한 수치나 발굴 상황을 고려하면 130㎝ 내외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성장 발달 수준을 고려하면 무덤에 묻힐 당시 나이는 대략 10세 전후가 될 것이라는 게 연구소의 판단이다. 나이만 어릴 뿐, 44호 무덤의 주인은 최상급 이른바 'A급' 인사로 여겨진다.
2020년 11월 발굴 과정에서는 돌 절구와 공이(물건을 찧거나 빻는 기구), 평균 1.5㎝ 크기의 바둑 돌 200여 점, 비단벌레의 날개를 겹쳐 만든 장식 390여 점이 한꺼번에 확인됐다. 모두 왕릉급에 준하는 무덤에서만 나오는 유물이다.
예컨대 돌 절구와 공이는 실제 곡물을 빻는 용도보다는 상징적 의미를 갖거나 혹은 약제를 조제하면서 사용한 도구로 추정되는데 돌 절구와 공이 모두 나온 사례는 황남대총 남분 뿐이다.
비단벌레 장식은 황남대총 남분, 금관총, 계림로 14호에서만 출토된 바 있다.
무덤의 규모, 구조, 그 안에서 나온 유물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무덤 주인은 5세기 후반 당시 신라 왕실의 여성, 즉 공주로 추정된다.
학계에서는 쪽샘 44호 무덤 조사가 국내 발굴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본다.
대부분의 발굴 현장은 가림막을 세우거나 출입을 통제하지만, 44호 무덤은 2014년 3월 인근에 '쪽샘 유적 발굴관'을 개관해 발굴 전 과정을 공개해왔다.
김연수 국립문화재연구원장은 "44호 무덤은 10년이라는 긴 시간 발굴 조사한 현장"이라며 "신라 고분을 언제든 볼 수 있게 소통하는 현장으로서 국내 발굴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강조했다.
정인태 학예연구사는 10년간의 발굴 과정에서 가장 힘든 게 뭐였냐는 말에 "발굴관이 있기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조사해야 한다. 다른 일은 절대 할 수 없다"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