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지금 신뢰·협력·연대라는 사회자본을 바탕으로 사회 구성원 모두가 자본가가 되는 새로운 자본주의 사회 실험에 한창이다. 물론 사회자본은 국내에서는 여전히 생소한 개념이다. 사회 구성원 간의 신뢰와 협력·네트워크·규범 등이 뒷받침돼야 하는 사회자본의 성격에 비춰볼 때 국내 사회경제적 여건은 이 같은 필요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사회자본에 기반한 경제적 연대 활동에 나서려 해도 당장 현행법이나 제도는 물론 사회적 관행 측면에서 적잖은 난관에 부닥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런 가운데서도 최근 지역사회 단위별로 사회자본의 효용성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면서 사회적 연대를 모색하려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신용협동조합도 사회자본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통해 관내 사회적기업과 활동가들을 적극 지원하고 나서 주목을 끈다. 문재인 정부도 사회적기업과 사회적경제 조직에 대한 정책적 지원을 확대해 나갈 방침이다. 전문가들은 사회자본이 중시되는 세계적 추세 속에서 법·제도 개선이 병행될 경우 국내에서도 사회적경제 조직이 활성화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보고 있다.
신협 정체성은 ‘CSR 아닌 CSV’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위치한 북서울신협은 6년 전부터 사전심사를 통과한 지역 내 사회적기업과 사회 활동가들에게 신용대출을 해주고 있다. 금리도 기존 조합원 대출이자보다 0.5%포인트 낮게 책정했다. 그뿐 아니라 ‘착한 임대사업’을 도입해 관내 주거 약자들이 셋방 보증금 급전을 필요로 할 경우 같은 금리로 빌려주고 있다. 이렇게 대출한 금액이 지난 6년간 100여 건에 50억원. 북서울신협 전체 대출의 8%에 달한다.
전재홍 북서울신협 전무는 “이 같은 시도는 신협의 정체성에 대한 치열한 내부 토론의 결과였다”며 “일반 금융회사처럼 돈을 버는 게 최우선 목적인가, 아니면 지역사회와 상생을 추구하는 금융협동조합으로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컸다”고 설명했다. 복지와 친환경 등 공익사업을 위한 자금 수요는 급증하고 있지만 단기 이윤을 우선시하는 기존 금융기관은 사회적기업에 대한 지원에 인색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신협이 책임감을 갖고 사회적 가치 창출을 위한 금융 지원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내부 논의 결과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이 아니라 CSV(Creating Shared Value)를 추구하는 게 신협의 정체성에 맞다’는 쪽으로 조합원들 의견이 모아졌다. 기업이 먼저 수익을 낸 뒤 사회공헌 활동을 하는 CSR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 창출을 주된 목표로 삼으면서 동시에 경제적 수익도 추구하는 CSV가 신협의 본래 설립 취지에도 부합한다고 본 것이다.
도입 초기 주변의 우려와 달리 사회자본에 대한 북서울신협의 투자는 날로 커지고 있다. 무엇보다 연체율이 제로라는 점이 고무적이다. 지난 7월 말 기준으로 전체 신협의 대출 연체율은 2.4%였다. 전재홍 전무는 “지역 활동가들이 대부분 이윤 추구보다는 사명감을 갖고 사회적경제 조직을 꾸리다 보니 대출에 대한 책임감도 높다”며 “낮은 금리의 신용대출을 노리는 가짜 사회적기업만 잘 걸러내면 경영 측면에서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시장이라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동작신협도 비슷한 고민으로 출발했다. 지역사회에 기여할 만한 협동조합의 경우 기존 은행에서 자금을 조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재무구조가 일반 주식회사와 달라 조합원들이 모은 자본금도 부채로 잡히곤 했고, 최대주주가 없다 보니 조직 구조 또한 은행의 정당한 평가를 받기 힘들었다. 이에 동작신협은 관내 사회적경제 조직 지원에 나설 경우 사회공헌은 물론 지역사회에 더욱 튼튼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이후 동작신협은 신용등급이 가장 좋은 개인 대출금리에 맞춰 최소한의 예대마진만 보고 사회적기업에 대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쌓인 대출액이 지난 6년간 104건에 83억원. 연체율도 0.67%에 불과하다. 주세운 동작신협 전략기획팀 과장은 “올해 총대출액이 100억원을 넘길 전망”이라며 “조합원들 반응도 좋아 현재 전체 대출의 3%대인 사회자본에 대한 투자를 10%까지 늘려나갈 방침”이라고 말했다.
이들 신협의 ‘성공’ 사례가 입소문으로 퍼지면서 전국의 신협에서 벤치마킹하려는 문의도 잇따르고 있다. 신협중앙회도 사회적경제 조직을 위한 기금으로 500억원을 조성해 이르면 9월부터 대출에 나설 예정이다. 주 과장은 “사회공헌과 경영 수익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다는 게 수치로 입증되면서 다른 신협들의 시각도 점차 전향적으로 바뀌어 가는 추세”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