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본 건에 대한 검찰의 판단이 아직 내려지지 않았고, 비록 가능성은 커 보이지 않지만 당사자들이 법정에서 다투게 될지도 모르므로 속단은 금물이다. 어쨌든 이번 사건이 알려지면서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의료계 안팎의 관심이 다시 고조되고 있다. 2006년 전면 개정된 <대한의사협회 의사윤리지침>은 "의사는 죽음을 앞둔 환자가 자신의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제16조 말기환자에 대한 의료의 개입과 중단), "의사는 의료행위가 의학적으로 무익, 무용하다고 판단된 회생가능성이 없는 환자에 대하여 환자 또는 그 보호자가 적극적이고 확실한 의사표시에 의하여 환자의 생명유지치료 등 의료행위의 중단 또는 퇴원을 요구하는 경우에 의사는 의학적, 사회통념적으로 수용될 수 있다고 판단되면 그들에게 충분한 설명을 하고 법령이 정하는 절차와 방법에 따라 그 의료행위를 보류, 철회, 중단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제18조 의학적으로 의미 없는 의료행위의 중단 등). 또한 <임종환자의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대한의학회 의료윤리지침 제1보>(2002. 9.)에서는 그 과정과 절차에 관해 상세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다.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의료계의 입장을 널리 밝히는 데 이런 문건들이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의료윤리에서 삶의 종료에 관한 논의는 크게 세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첫째, 가장 널리 논의되고 있는 안락사이다. 둘째는 존엄사. 안락사의 대안으로 자주 논의된다. 셋째, 의료계에서는 안락사 또는 존엄사라는 용어 대신 말기환자의 치료 중단이라는 개념을 제안하고 있다. 안락사(安樂死)는 어원적으로 수월한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치유될 수 없는 질병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을 뜻한다. 안락사를 몇 가지로 유형으로 분류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 즉 환자가 이전부터 존재하던 질병이 원인이 되어 죽음의 과정에 들어섰을 때 그 진행을 저지하거나 지연시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방치함으로써 안락사시키는 경우를 "소극적 안락사(passive euthanasia)"라고 부른다. 보수주의자들은 이러한 유형의 안락사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소극적 안락사 역시 환자의 죽음을 의도하기는 마찬가지라는 이유에서다. 어떤 이들은 소극적 안락사의 의미를 더욱 좁혀서 존엄사(尊嚴死, death with dignity)라는 개념을 사용하기를 원한다. 식물인간 상태와 같이 환자에게 의식이 없고 그 생명이 단지 인공심폐기에 의하여 연장되고 있는 경우에 품위 있는 죽음을 위해 생명연장 조치를 중단하자는 취지에서다. 그런데 이 용어의 의미가 명확하지 않다는 게 문제다. 1994년 미국 오리건 주가 제정한 "The Oregon Death with Dignity Act"에서 존엄사는 존엄 또는 자비를 목적으로 하는 자발적 안락사로서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을 의미했다. 심지어 의사조력자살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존엄사는 소극적 안락사와 동의어로 쓰인다. 다시 말해, 존엄사에 대한 일본의 정의는 오리건 주의 그것보다 더 제한적인 상황을 뜻한다. 존엄사, 그 취지는 좋았을지언정 혼란만 부추긴 결과를 낳았다. 바람직한 삶의 종료를 논의할 때 제3의 용어를 택한 그룹이 있다. 의료계는"안락사"가 거부감이 심하고 "존엄사"는 의미가 분명치 않으니, 중립적인 새로운 용어로서 "치료 중단"을 쓰자고 제안해 왔다. 환자의 치료를 시작하지 않거나 일단 시작한 치료를 중지하여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을 "치료 중단"이라고 부르자는 것이다. 이 제안의 배경에는 의사가 안락사에 개입하는 것은 차단하되, 의사로 하여금 환자 또는 보호자와의 협의 하에 연명치료를 유보하거나 중단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하자는 생각이 깔려있다고 이해된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연명치료 중단"이라는 낯선 용어를 논의의 장에 적극적으로 수용해 줄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렇다면 의료계의 남은 과제는 "안락사" 또는 "존엄사"를 대신할 "연명치료 중단"의 의미를 국민과 사회에 정확히, 친근한 방법으로 홍보하는 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사람이면 누구나 좋은 삶을 살기를 원하듯, 좋은 죽음을 맞이하기를 원한다. 사고를 당하거나 병마에 시달리지 않고 천수(天壽)를 누린 후, 지나간 삶을 정리할 시간이 주어진 가운데 가족, 친지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떠나는 죽음. 이런 게 우리 모두가 소망하는 "좋은 죽음(good death)"일 것이다. 그런데 평안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 다섯 명의 한 명꼴 밖에 안 된다고 한다. 오늘날 대부분 병원에서 일어나는 죽음의 과정은 추한 모습과 고통을 동반하기 십상이다. 선진국의 문턱에 도달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국민들의 최대 관심사가 "교육"과 "건강"이라면, "좋은 죽음"에 대한 일반인의 수요와 관심은 시간이 감에 따라 점차 더 커질 전망이다. [의협신문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