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현아, 2007년 새날 고향 뒷동산에 올라 뜨는 해에 네 얼굴 그려놓고 명복을 빌고 돌아서니 벌써 6월이다. 6월은 도현이 이름만 이름만 불러도 가슴이 시려온다. 눈물이 하염없이 가슴 속에 냇물이 되어 흐르는구나...” 조국을 위해 산화한 젊은 아들을 떠올리며 추모의 글을 낭독하던 아버지는 끝내 말을 잊지 못했다. 한(恨)맺힌 피울음으로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토해낸 그는 서해교전 당시 전사한 고(故) 황도현 중사의 아버지, 황은태씨였다. 이제는 따뜻한 손의 온기 대신, 듬직하고 시원한 웃음 대신, 차가운 청동부조 안에 새겨진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황씨의 얼굴에는 깊은 슬픔이 서렸다. 다시 안아볼 수 없는 아들이 목숨을 걸고 지킨 조국, 그러나 그 조국의 응답은 싸늘하고 야박했다. 지난 5년간 한번도 찾아오지 않은 대통령, 서해교전을 잊어가는 국민, 군인 월급의 36개월치 보상...아들의 목숨 값은 조촐한 것이었다. |
이날 추모식에는 6명의 전사자 유가족들과 당시 교전에서 생존한 참수리 357호정 승조원들, 김장수 국방장관, 송영무 해군참모총장, 제2함대 사령부 장병, 제2함대 사령부와 자매결연을 한 경기 평택 포승중 학생 200여명 등 1300여 명이 참석했다. 또 이날 행사에는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와 열린우리당 정세균 의장, 통합민주당 박상천 대표, 국민중심당 심대평 대표 등 여야 지도부 10여 명도 참석했다. 이번 추도식에는 그동안 불참했던 국무총리가 처음 참석,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한 총리는 헌화와 분향만 했을 뿐 추도사는 하지 않았다. 임기 동안 한번도 발길을 하지 않았던 노무현 대통령도 불참했다. 대신 백종천 청와대 안보실장이 자리를 지켰다. 이날 추모식은 사령관의 추모사와 헌화·분향, 조총발사와 묵념 순으로 진행, 40여분 만에 끝났다. 목숨을 바쳐 NLL을 사수하다 장렬히 전사한 여섯 젊은이들의 희생을 기리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황기철 해군 제2함대 사령관은 추모사에서 “전사자들의 고귀하고 값진 희생 정신으로 우리의 바다를 지켜낸 그대들의 숭고한 군인정신과 뜨거운 애국심은 조국을 지키는 장병 모두의 정신적 표본으로 영원히 이어자고 있다”고 말했다. 황 사령관이 5년 전 이날 한국영해를 침범한 북한 경비정의 선제공격에 맞서다 순국한 6명의 젊은 해군 고(故) 윤영하 소령, 한상국 중사, 조천형 중사, 황도현 중사, 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의 이름을 호명하자 유가족 사이에서는 서러운 흐느낌이 터졌다. 정부는 서해교전 발발 5년이 지나서야 6명의 순국장병을 뒤늦게 기렸다. 지난 5월 2일 노무현 대통령이 서해교전의 유족 등 22명을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베풀었고 현충일에는 전사자 6명의 이름이 용산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에 올랐다. 28일에는 대한민국 해군의 차기고속정(KPX-α)을 ‘윤영하함’으로 명명하고 진수식을 가졌다. 그러나 누구도 알아주지 않은 초라한 영웅대접에 섭섭했던 탓인지 유가족들은 아쉬움을 못내 떨치지 못했다. 유가족들은 “아들이 마음 편히 쉬었으면 좋겠다” “정부가 무엇을 해줬는지 원망스럽다” “세월이 흘러도 아들을 잊을 수가 없다” 등 정부에 외면당한 아픔과 세월에 더해지는 천륜의 정을 토해냈다. 이날 일부 유가족들은 군 주관으로 거행된 추모식을 앞으로 민간단체나 정부가 여는 방안을 시민단체 등과 협의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
‘서해교전’은 한반도가 월드컵 열기로 빨갛게 물들어 있던 2002년 6월 29일 오전 10시경 연평도 서쪽 해상에서 북방한계선 NLL을 넘어온 북한 경비정이 우리 고속정에 의도적인 선제공격을 하면서 시작됐고 당시 북한북과 교전을 벌였던 장병 6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이다. 국방부는 당시 북한군은 모두 3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이 가운데 13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