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기아·재해 등으로 황폐화된 땅에 신(神)을 대신해 달려간 국제구호활동가들. 그들 중 일부가 헐벗고 굶주리는 현지인들을 돕기는커녕 한푼의 돈, 한줌의 식량으로 인권을 유린한 백태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영국 기반의 국제구호단체 옥스팜 직원들이 2011년 중미 국가 아이티에서 지진 피해자 구호 활동 중에 성매매를 했다는 스캔들이 불거지면서다. 1942년 출범해 전 세계 90개국에서 1만여명의 직원을 둔 옥스팜은 역사나 규모 면에서 국제구호단체의 ‘맏형’ 격이다.
20일(현지시간) 긴급 소집된 영국 하원 국제개발위원회 청문회에서 마크 골드링 옥스팜 대표는 “아이티 피해자들 뿐 아니라 국제구호 분야에 누를 끼친 점을 거듭 사죄드린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선 스캔들이 공론화된 후 열흘 만에 옥스팜 후원자 7000여명이 정기 기부를 취소한 것으로 확인됐다. 옥스팜 측은 “직원들의 비위 26건을 추가 확인 중”이라면서 재발 방지를 위한 강도높은 자구책 마련을 약속했다.
아동구호단체 ‘세이브 더 칠드런’의 케빈 왓킨스 대표는 이날 하원 청문회에서 “2016년 아동안전 관련 53건의 문제적 행동을 적발해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이 가운데 성 관련 비위가 얼마나 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현지 언론 보도에 따르면 영국 적십자와 크리스천 에이드 등 다른 구호단체들에서도 수년 간 다수의 직원 비위가 적발됐지만 경찰 고소 등 공론화된 것은 거의 없다. 조직에서 쫓겨났다 해도 다른 자선단체에 버젓이 재취업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유엔 단체서 12년간 2000건 성학대
문제는 이 같은 성학대·착취가 처음 알려진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세이브 더 칠드런은 2008년 충격적인 보고서를 낸 바 있다. 코트디부아르·아이티·남수단 등에서 국제구호 분야 직원들 및 유엔평화유지군들의 활동 현황을 조사한 결과 성폭행·성매매·아동포르노 범죄 등이 다수 확인됐다는 내용이었다. 언어적 성적 학대가 60% 이상으로 가장 높았지만 강압에 의한 성관계도 적지 않았고 피해자 중엔 6세 여아도 포함돼있다는 증언도 나왔다. 당시 세이브 더 칠드런은 이 보고서 발표와 함께 국제적인 감시장치 마련을 촉구했고 옥스팜 역시 강력한 연대를 표했지만 정작 내부 관리엔 실패했다. 문제 있는 활동가가 극히 일부라 할지라도 이는 구호단체 전반의 신뢰도 하락을 부른다. 특히 후원금 모금 광고 등에서 구호활동가의 이미지가 ‘사선(死線)에서 헌신하는 선한 사람들’로 채색돼 있기에 더욱 그렇다. 이런 자의식은 일부 구호활동가들을 잘못된 도덕 관념으로 이끌기도 한다. 영국 싱크탱크 시비타스(Civitas)의 조너선 포맨 수석연구원은 CNN 기고에서 “수년간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 속에 일부 활동가들은 ‘일반인의 도덕적 규칙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는 식의 잘못된 의식을 갖게 된다”고 꼬집었다.
내부 고발이 어려운 조직문화 특성도 작용한다. 재원을 거의 전적으로 기부금에 의존하는 단체들로선 이런 문제가 새나갔을 때 정부 보조금이나 개인 후원금이 끊길까봐 ‘쉬쉬’한다.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도 국제구호가 줄어들까봐 문제를 공론화하기를 꺼린다. 세이브 더 칠드런 한국지부의 박영의 커뮤니케이션 부장은 “자정(自淨) 노력이 활발한 단체들이 문제를 공론화함으로써 오히려 불이익을 받게 되는 아이러니가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