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 금 허리띠, 금귀걸이, 금팔찌…. 화려한 금빛 향연이 이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어둠이 내려앉았다. 약 100㎡ 규모의 공간에 놓인 건 전시 진열장 하나. 주변의 빛이 사라진 그곳에는 1천500년 전 신라의 시간을 간직한 그림 하나가 있었다. 자작나무 껍질 위에 그린 성스러운 동물, 천마(天馬)다.
50년 전인 1973년 경주 황남동 155호분 발굴 조사단으로 참여했던 윤근일 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은 아무 말 없이 천마 그림을 바라봤다.
그는 천마가 긴 잠에서 깨어난 그날이 떠오르는 듯 옅은 미소를 띤 채 "상태가 좋아 보인다"고 말했다.
오래전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신성한 동물로 여겨졌던 천마가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다. 실물이 공개된 건 2014년 이후 약 9년 만이다.
국립경주박물관이 4일 선보인 특별전 '천마, 다시 만나다'는 1만1천500여 점의 유물이 쏟아진 이 무덤이 왜 '천마총'이라는 이름을 얻었는지 알 수 있는 자리였다.
천마총 발굴 50주년을 기념해 열린 이번 전시는 천마총의 핵심을 집약한 '요점 정리' 같았다.
정효은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2014년 '천마, 다시 날다' 전시 이후 9년 만에 열리는 이번 전시에서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명품'으로 꼽을 만한 유물을 엄선해 기획했다"고 소개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1973년 8월 천마가 그려진 말다래(장니·障泥)를 수습하던 순간을 영상으로 보여준다.
말다래는 말을 탄 사람에게 흙이 튀지 않도록 안장 양쪽에 달아 늘어뜨리는 부속품이다. 흔히 '천마도'라고 알려진 대표 유물은 바로 말다래에 하늘을 달리는 천마를 그린 그림이다.
가장 먼저 만나는 전시품은 국보 '천마총 금관'·'천마총 관모' 등을 촬영한 10여 점의 대형 사진이다.
국내 대표 사진작가 중 한 명인 구본창 작가가 표현한 신라의 황금이다.
흔히 유물은 검은 배경으로 찍은 경우가 많은데, 구 작가는 황금과 비슷한 배경을 써 오랜 세월에도 변함없이 아름다운 빛깔을 지닌 특성을 강조했다.
구 작가는 전시 소책자에 담은 작가의 말에서 "렌즈를 통해 1천500년 전 황금 유물을 가까이 볼 수 있었던 시간은 특별했으며 금관의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충분히 증거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사진으로 천마총의 대표 선수들을 만났다면, 이어진 공간에서는 금관, 관모 등의 유물을 눈앞에서 직접 볼 수 있다.
국보 '천마총 금제 허리띠'를 비롯해 무덤 주인의 왼쪽 허리춤에서 출토된 봉황 장식 고리자루큰칼, 팔찌, 반지, 귀걸이 등이 관람객을 맞는다.
정 학예연구사는 "마립간 시기(356∼514)는 황금 장신구의 전성기였는데, 천마총은 그 끝자락에 해당해 금속 공예의 정수를 보여준다"며 "뒷면까지 감상할 수 있도록 공간을 조성했다"고 말했다.
푸른 빛이 돋보이는 보물 '천마총 유리잔', 원뿔 형태로 감아 놓은 유리구슬 목걸이 등도 주목할 만하다.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천마 그림이다.
하얀색으로 그려진 천마는 유리 너머로도 신라의 예술혼을 전한다. 일부가 갈라지거나 살짝 휘기도 했지만, 상서로운 기운을 내뿜으며 하늘을 달리는 역동적인 모습은 그대로였다.
비슷한 듯, 아닌 듯 다양한 종류의 천마 관련 유물을 보는 것도 이번 전시의 묘미다.
흔히 알고 있는 천마도는 네모반듯한 판에 흰색으로 그린 1점이다. 그러나 말다래는 안장의 양쪽에 매달아 사용하기에 2점이 한 쌍을 이룬다. 천마도 역시 정확히는 2점이 있다.
대중에 잘 알려진 아래쪽 말다래는 6월 11일까지, 위에 얹혀 있어 먼저 발견됐지만 상대적으로 손상이 심했던 말다래는 6월 12일부터 7월 16일까지 선보일 예정이다. 발굴 조사 당시 위아래로 놓여 있었던 천마 그림을 차례로 볼 수 있는 셈이다.
금동 판 위에 천마를 표현한 유물도 눈여겨볼 만하다.
함순섭 국립경주박물관장은 "천마 그림 말다래, 천마 무늬 말다래 등 총 4종류의 천마를 다 보여주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며 "마립간 시기에 천마 관련 물품이 보편적으로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천마 그림 말다래를 만나는 순간은 눈으로만 간직해야 한다.
1천500년 세월을 간직한 유물을 보존하기 위해 3부 전시 공간에서는 사진 촬영이 제한될 예정이다.
함 관장은 "천마총은 우리 손으로 신라의 능·묘를 제대로 발굴한 첫 사례이자 신라 고고학 연구의 토대"라며 "지난 50년이 천마총을 연구한 기간이었다면 앞으로는 그 성과를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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