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내게 던지는 질문이 하나 있다.
“장례 문화가 쉽게 바뀔까요?”
천년 동안 이어진 습속(習俗)이 쉽게 고쳐질리 없다. 나도 안다. 하지만 나는 그 때마다 서현(서울대 건축가)교수의 이야기로 답한다.
“세계의 문화사가 증명하되 가장 변화 저항이 강한 것이 장례문화다. 그런데 한국은 매장이 화장으로 바뀌는데 한 세대도 필요치 않았다.”
이를 뒤집으면 세계가 못할 일을 한국인은 해낼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한 세대’가 가기 전에 반드시 뒤집어질 것이다. 한국민족의 성질이 뭔가? ‘한다면 한다.’ 그것도 매우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국제통화에서 한국의 국가번호는 82다. 전기통신연합(ITU)이 어떻게 알고 이 번호를 부여했을까? 한국인의 급한 성미를 못 견뎌 82를 부여했다지 않은가?
두 번째 많이 받는 질문이 있다. 장례문화에서 꼭 바꾸어 놓고 싶은 것은 무어냐는 것이다. 나는 한 마디로 말한다.
“놀이 문화의 회복”이라고.
지구촌에 장례놀이를 그토록 성대하고 진하게 하는 민족은 우리밖에 없다. 밤새도록 슬픔에 잠긴 상주를 위로하는 가무극놀이를 한다. 출상 전날 밤 제청놀이가 대표적이다. 비통해 하는 상주를 웃기기 위하여 재담이나 노래, 우스운 병신춤까지 췄다.
‘상여놀이’에는 반드시 상여소리가 뒤따랐다. 고인의 인품이나 성격, 공덕을 드러냈다. 유언이 전달되기도 했다. 이런 행위는 출상 전날 이뤄졌다. 일종의 리허설이었다. 장례의 품격을 지키기 위한 장치였다. 발인 때는 꽃상여에 태워 풍악을 울린다. 시집가는 처녀가 꽃가마를 타는 것과 똑같다.
장례는 장례로 끝나지 않았다. 이어령교수의 통찰대로 희랍어에서 온 단어 자궁(womb·움)과 무덤(tomb·툼)은 놀랄 만큼 닮아있다. 태어나는 것이 곧 죽음을 향한 것이고 죽음은 언제나 새로운 탄생이다.
김병종교수(서울대 전 미대 학장)는 ‘손주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의 연원(連原)을 이렇게 고백한다.
“봄이면 보랏빛 자운영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지고 노란 구름처럼 일어나던 송홧가루 하며, 파란 보리밭 사이로 둥둥 떠가던 오색 상여의 모습 같은 것이 나를 ‘먼 북소리’처럼 ‘환쟁이’의 길로 불러내었던 것 같구나.” 어디 ‘환쟁이’만이었겠는가? 나는 확신한다. 장례의 필수였던 ‘여흥놀이’가 오늘날 빌보드를 휩쓸고 있는 방탄소년단(BTS)의 유전자라고. 세계적인 아티스트 김남준의 예술혼도 장례식장의 제단에 뿌리를 두고 있는게 아닌가?
장례가 ‘일상의 축제’가 되는 그 날을 꿈꾸는 이유는 딱 한가지다.
“생명의 갈망과 문화의 융성”
#메멘토모리 #장례는축제다 #송길원목사 #하이패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