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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뉴스

“느닷없는 추모관 때문에 한인사회 발칵”

사할린 한인 이산가족의 아픔을 악용하는 사람들

“왜 남의 집 부모 위패를 허락 없이 만들어 와서 ‘무연고자 추모관’이란 간판을 걸어놓고는, 한국에서 오는 관광객들을 데려와서 향불을 피우도록 하는가는 겁니다? 도대체 저의가 뭐냐는 거지요?”

사할린한인협회 박순옥 회장이 한인협회 사무실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사할린한인협회는 유즈노사할린스크에 있는 한인문화회관 2층에 있었다. 이곳을 찾은 것은 2월21일이었다. 이날 저녁 유즈노사할린스크 악짜브리극장에서 열리는 ‘3.1운동 100주년 기념 평화통일 페스티벌’을 앞두고, 사할린 한인사회의 얘기를 듣자고 박 회장을 찾았을 때였다.

“우리 어머니 위패도 세워놓은 것을 봤어요. 우리가 집에서 제사도 잘 모시는데, 왜 남의 위패를 만들어 놓고, 우리 대신 향불을 피우는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아요. 사할린이산가족협회 회장님은 거기에서 가족 5명의 위패를 확인했습니다.”



문제의 추모관은 사할린에서 수산업과 건설업 등을 하는 한국인 현모씨가 유즈노사할린스크 인근 농장에 만든 것이다. 현씨는 한국에서 만들어온 7,300명의 위패를 비치해놓고 ‘사할린 한인 추모관’이란 이름을 붙인 채 한국인 관광객들을 이끌어 들이면서 사할린 한인사회가 발칵 뒤집힌 것이다. 이 일에는 부산MBC도 한몫을 거들었다. 부산출신인 현씨의 소개로 작년 7월 사할린을 찾은 부산MBC는 현씨가 만든 추모관을 취재해 사할린 징용 무연고자 추모관이라고 소개했던 것이다.

“우리는 8월에 벌초를 하고 성묘를 한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부산MBC는 7월에 풀이 무성하게 자란 묘들을 찍어서는 무연고 묘라고 방영을 했어요.”

이 때문에 사할린 한인사회와 현모씨는 지금 소송이 진행 중이라고 한다. 박 회장과 사할린이산가족협회장 등이 “추모관을 없애고 사할인한인들한테 사죄하라”며 현씨를 고소한 것이다. “처음에는 사할린 징용한인 무연고자 추모관이라고 했다가, 이름을 두 번이나 바꿔서 지금은 ‘사할린 한인 추모관’이라 내걸었어요. 이게 추모관 입구를 찍은 사진입니다. 대문 위에 ‘백두산 꽃사슴 자연농장’이란 간판을 가로로 크게 붙이고, 그 아래 같은 ‘사할린 한인 추모관’이라고 또 간판을 붙였잖아요.”


박 회장은 “현씨가 우리를 얼마나 얕보았으면 이런 일을 벌이겠느냐”면서 사할린 한인사회가 이 때문에 크게 속상해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현씨 추모관에는 징용과는 전혀 무관한 일본인들의 위패도 있고, 전후에 태어난 사람까지 있다”면서 “한국 정부가 2011년에 벌인 국외 강제동원 실태조사 자료를 넘겨받아 위패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박 회장은 1966년생으로 올해 53세다. 그의 부친은 강제모집으로 1939년 사할린에 왔다. 그의 부친은 오랫동안 독신으로 지내다가 뒤늦게 결혼해, 박 회장이 태어났을 때는 부친이 52살 때였다고 한다.

“1975년 한국으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사할린 한인들이 한국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사할린 한인 90%가 남한에 고향을 둔 사람들입니다. 냉전으로 인해 오랫동안 고향소식을 들을 수 없었지요. 그때의 편지도 일본을 거쳐서 들어왔습니다.”

그의 부친도 편지를 받았다. 그리고는 고향이 그리워 울고불고 하다 6개월만에 타계했다고 한다. 박 회장이 열 살 때였다. 병명은 암이었다.

“사할린에는 1975년부터 77년 사이에 돌아가신 분이 많아요. 목을 빼고 기다리던 한국 가족 소식을 듣고는 아버지처럼 괴로워하다 돌아가신 거지요.”

박 회장은 아버지가 임종하고 10년이 더 지난 뒤 어머니로부터 “부산에 ‘큰어머니’가 계신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가 스무살이 되던 해였다. 그리고 1930년생인 터울 많은 언니가 부산에 살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부친이 16살 때 태어난 딸이었다.

“언니와 처음 만난 것은 1997년이었습니다. 언니가 사할린을 찾아왔습니다. 알아볼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공항을 빠져나올 때 바로 언니인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 모습 그대로였어요.”

노보시비르스크대학 건축과 출신인 박 회장은 이 같은 개인적인 가족사를 바탕으로, 1997년부터 사할린이산가족협회 일을 돕기 시작한다. 그리고 6년간 이산가족협회 회장도 지낸 끝에 2016년 11월부터는 사할린한인협회장을 맡아, 한인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

“사할린의 한인들은 광복이후에도 너무 오래 이산의 아픔을 안고 살아왔습니다. 지금은 한국정부가 1세들의 고국 귀환은 허용했지만, 귀국한 1세들은 자녀, 손자 손녀들과 떨어져 살고 있어요. 그래서 다시 돌아오고 싶어해요. 이처럼 다시 서로 새로운 이산의 세월을 보내고 있어요. 가족과 떨어져 살면서 행복할 수 있나요.”

박순옥 사할린한인회장의 뼈있는 항변이다. 그의 목소리는 사할린한인문화회관을 벗어나서도 한참이나 귓전을 맴돌았다. [출처 : 월드코리안뉴스(http://www.worldkore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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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적성이니 사명이니 무슨 생각으로 그랬겠나. 돈을 벌고 싶어서 의·치대에 관심을 가졌고, 그 중에 서도 돈을 벌 때까지 더 오랜 시간 수련해야 하며 ER 근무까지 있는 의과대학보다, 조기에 수익창출이 시작되며 일의 고됨도 비교적 낮아 보였고 비급여 항목이 많았던 치과대학에 매력을 느꼈을 뿐이다. 한때 치대 입시가 의대 이상이던 시절도 있을 정도였으니, 당시로선 재무관리적 사고를 내재화한 합리적 경제인의 판단이었다. 어쨌든 그때 높은 확률로 고정수익이 예상되는 치과대학보다, 미래 직업과 기대소득이 확정되지 않은 일종의 위험자산이라 할 수 있는 서울의 인문대, 사회대를 택한 것도, 결과론적인 관점이지만 지금 보면 경제적으로도 최악은 아닌 선택이었다. 무엇보다 시골생활 6년을 못 버티고 옮겼을 것이다. 실제 그런 이유로 지방국립의대를 다니다 온 대학 동기도 있었던 때이니. 2. 그런 상상과는 사뭇 다른 광경들을 본다. 강북삼성병원 정신과 의사 피살에 이은 국립중앙의료원 응급의료센터장 과로사. 환자에게 살해당한 정신과 의사의 유족은 원망하기는 커녕 조의금 1억 원을 기부했으며, 일 주일에 한번 퇴근하는 격무에 시달리다 과로사한 국립중앙의료원 센터장의 유족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