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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창

[이야기첩보전] 일본 '니시카와 카즈미'



▲ 티벳 수도 라사는 외견상 극락정토같은 신비로운 성지의 분위기가 그윽하다.

 

일찍이 메이지시대에 산스크리트어, 티벳어 불경을 구하려 티벳 라사에 잠입한 에 이어 티벳 연구의 명맥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쇼와(昭和)시대 들어 니시카와 카즈미(西川一三)라는 걸출한 첩보요원으로 이어진다.

 

에카이가 순수한 학문목적인 데 반해 니시카와 카즈미의 잠행은 일본의 지역전략 차원에서 구상되고 실현된다. 남만주철도(南満州鉄道) 대련본사의 직원이었던 니시카와 카즈미는 1941년 중국 서북지역을 동경해 만철을 퇴사하고 주몽고 일본대사관이 관리하는 중앙아시아 정보원 양성소인 흥아의숙(興亞義塾) 3기생으로 입학한다. 현재의 내몽고 수이위앤에 위치한 흥아의숙에서는 몽고어와 터키어, 한어(漢語) 요원을 양성했는데 니시카와는 몽고어를 전공하고 주몽고대사관 조사부의 정보요원이 된다.

 

당시 일본 총리였던 도조 히데키는 흥아의숙의 요원들에게 서북지나(支那)에 잠입해 변경 민족의 친구가 돼 영주하라는 특명을 내린다. 도조의 특명 배경에는 일본이 만주, 몽고, 티벳, 그리고 페르시아어로 중앙아시아 민족권을 뜻하는 투란(Turan)권의 투르키스탄, 위구르 등을 연계해 중국을 배후에서 포위하는 동시에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해 중국공산당과 연계하는 것을 막는다는 지역전략이 있었다.

니시카와 카즈미는 외무성의 지령에 따라 몽고 라마승으로 위장하고 아름답고 성실한 마음이란 의미의 티벳어 롭산 산보(洛桑桑宝)를 가명으로 쓰기로 하고 내몽고를 떠난다.

 

그는 1년 10개월에 걸쳐 중국의 닝샤(寧夏), 간수(甘粛),칭하이(青海)에 걸친 2천 킬로미터의 여정을 누빈다. 지금처럼 실크로드나 중앙아시아를 소개하는 다큐도 없던 시절에 실크로드보다 훨씬 남단지역에서 톈산산맥 남쪽으로 고원을 두루 누비면서 각 민족의 민속학적 특징을 박학다식하고 예리한 눈으로 기록한다.

 

예를 들면 몽고, 티벳인의 생활습관에 대해서도 아주 세밀하게 묘사한다. 몽고의 경우 화장실이 없어 변을 보면 개에게 먹이며 티벳에서는 건물 꼭대기에 화장실이 있어 인분과 쓰레기 오수를 버리면 아래층에서 비료로 사용한다고 적었다. 티벳 여성들은 대체로 명랑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대변을 본 뒤 닦는 습관이 아예 없어 이를 보고 당황했다고도 적었다.

자신이 혹시 나뭇잎으로라도 닦으면 기이하게 보여 신분이 들통날 것을 우려해 스스로도 따라했는데 적응하느라 애를 먹었지만 다행히 현지 기후가 극도로 건조해 불결한 느낌은 그나마 덜했다고 기록했다. 이와 함께 티벳인들은 평생 동안 목욕을 하는 법이 없었다고도 술회했다. 잠행중에 니시카와는 현지 협력자의 신발 속에 정보를 적은 내용을 넣어 꿰메는 식으로 외무성에 정보보고를 한다.

 

니시카와 카즈미는 티벳으로 성지순례를 가는 몽고승려의 행렬에 끼어 태평양전쟁 막바지인 1945년 티벳의 수도 라사에 잠입하는 데 성공해 하급승려로 지낸다. 라사에 머무는 동안 니시카와는 일본이 패전했다는 소문을 접하게 된다. 전쟁이 끝나는 바람에 보고할 대상도 없어졌고 외무성의 송금도 끊기는 고립무원의 상황에 처했지만 현지 상황과 지도를 작성하는 임무를 포기하지 않는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현지에 눌러앉아 임무를 수행하는 잔치첩자(残置諜者)의 신분이기도 했지만 귀국하려 해도 여비가 없었다. 그는 라사에서 인도로 나와 담배 밀수와 거지 생활을 하다 1946년 라사로 다시 잠입해 드레풍 사원(Drepung哲蚌寺)에 들어가 1년 동안 불교 수행과 어학 공부에 매진한다.

 

이 기간 동안 티벳의 신정체제와 현지인들의 심성에 대해 그의 저서 <비경서역 8년의 잠행(秘境西域八年の潜行)> 가운데 ‘라사의 뒤안길’이라는 장(章)에 상세한 기록을 남긴다.

 

정부의 수뇌부라고 하는 이들은 소작인과 백성을 위한다기보다는 그들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착취하는 데 골몰했다. 세습귀족인 지배층은 일반 백성이나 라마승 사이에서 자기들보다 학문이나 사상이 뛰어난 자가 나타나면 이유 없이 권력을 동원해 압박하고 매장하는 데 노력했다.

 

티벳에 머무는 동안 가장 공포스러운 것은 불법을 불법으로, 부도덕함을 부도덕으로 인정하지 않는 봉건적 티벳 정부의 정치였다. 처음에는 중국 관헌이 티벳보다 위험하다고 느꼈지만 점차 이 생각은 바뀌게 됐다. 민간에서도 덕(德)보다는 금전이 더 통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정부 내 귀족, 고승(高僧)등 지도층에서는 파벌이 있어 서로를 어둠에 매장시키는 등 추한 권력싸움이 일상적으로 반복됐다.

 

백성을 지켜야 할 군대도 공포스러운 존재였다. 티벳에 폭동이 발생하면 군대는 폭동 진압보다는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것이 우선이어서 백성들은 폭동 자체와 군대로부터 이중 피해를 봤다. 백성들은 군대가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또 티벳 수도 라사는 외견상 극락정토같은 신비로운 성지의 분위기가 그윽하고 사람들이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상상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도덕이 붕괴돼 풍기는 문란했으며 세상에 라사만큼 더러운 거리도 없다. 티벳의 일반인들은 하루 종일 향을 사르고 불공을 드리며 자업자득과 인과응보를 믿는다고 하지만 불교의 근본원리인, 사람으로서 행해야 할 도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이나 자기수양은 발견할 수 없었다.

 

티벳인들의 성정(性情)도 겉과 속이 양극단으로 강자에게는 고양이처럼 온화하게 복종하지만 약자에게는 정반대로 겉으로는 자비심으로 충만한 것 같지만 그 속은 적개심과 복수심으로 가득차 있다. 예의가 있는 것 같지만 비굴하며 배타적 근성에 독선적이기까지 하니 이는 황량한 티벳의 자연환경, 뿌리깊은 봉건제도, 그리고 동쪽으로는 중국, 서쪽으로는 인도와 영국의 사이에 포위된 국제관계와도 관련이 있다.

 

니시카와는 몽고 라마승으로 신뢰를 얻게 돼 한동안 평온한 나날을 보내다 다시 라사를 떠나 수행승과 상인으로 위장하고 부탄, 시킴, 네팔, 인도의 각지를 다시 잠행한다. 그러다 1949년 인도에서 일본인의 밀고로 체포돼 이듬해인 1950년에 귀국한다.

 

니시카와는 라마승으로 위장하고 정보를 수집했다.
▲ 니시카와는 라마승으로 위장하고 정보를 수집했다.

 

그가 귀국하고 한달쯤 지나자 연합군사령부 GHQ는 그에게 출두명령을 발부한다. 이때 니시카와는 GHQ에 앞서 중앙아시아 조사를 명했던 외무성을 방문하지만 패전국 정부기관의 트라우마 때문인지 정보의 보고인 그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상대도 하지 않는다.

 

반면 GHQ는 특별히 조사실까지 마련하고 니시카와로부터 서역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다. GHQ는 1년 동안 일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일본어 통역을 붙여 질의응답을 반복해 이를 기록하는 방식으로 그의 잠행정보를 자세히 청취해 기록했다. 그가 GHQ에서 구술한 내용은 대략 1천여 페이지 분량으로 추정되는데, 3년 후 <비경서역 8년의 잠행(秘境西域八年の潜行)>이란 책으로 정리돼 출판된다.

 

이후 니시카와는 중앙아시아, 히말라야, 티벳을 두루 섭렵한 원로 산악인, 탐험가 대우를 받게 된다. 쿄토대 이학박사면서 탐험가 산악인으로 제1차 남극관측대 부대장을 지낸 니시보리 에이자부로(西堀栄三郎)도 일본 최초로 8천미터의 마나슬루 등반계획을 세울 때 그를 방문해 자문을 받는다.

 

그는 만년에 이와테현 모리오카(盛岡)시에서 이미용(理美容) 재료상을 하며 부지런하게 살다 2008년 2월 7일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는데 마침 이날이 공교롭게도 티벳의 설이었다. [글 : 박상후/  출처 : 제3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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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모병원 의사 피살사건 관련 대한의사협회 입장
새해를 하루 앞둔 2018년 12월 31일, 서울 모 병원에서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의료진에 대한 폭력 사건이 유난히 많았던 지난 한해, 전 의료계가 한 마음으로 대책을 강구하여 왔으며 그 첫 성과로 국회에서 응급의료 종사자에 대한 폭행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이 통과된 지 불과 며칠 되지 않은 상황에서 참변이 벌어진 것이다. 새해를 맞이한 의료계는 충격과 슬픔에 잠겨 있다. 대한의사협회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회원의 명복을 빌면서 이번 사건에 대한 몇 가지 입장을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 이번 사건은 예고된 비극이라는 점이다. 의료인에 대한 환자와 보호자의 폭행은 수시로 이루어져 왔으며 살인사건 역시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진료현장에서 분명한 폭행의 의도를 가진 사람의 접근에 대해서 의료진은 무방비 상태일 수밖에 없으며 이것은 절대 개인의 힘으로 예방하거나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의료계는 그동안 정부와 정치권을 향하여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의료진의 입장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특단의 대책을 요구하여 왔으나 번번이 좌절되어 왔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응급실 내 폭력사건에 대한 처벌 강화가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