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부터 말로만 많이 듣던 곳으로 예전과는 달리 엄청난 변화가 있다고 듣고 있는 터였다. 연길공항에 내려서부터 우선 말씨가 같고 한글이 널리 통용되고 있어서 외국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2박3일간의 빠듯한 일정에 많은 곳을 갈수가 없어서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도문을 찾았다. 사진에서만 보던 두만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거기에 있었고 보초서는 군인의 감시 하에 한가운데 국경표시까지만 접근할 수 있었다. 강 건너 북한 땅의 건물들과 간간이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망원경을 통해 볼 수 있었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필요와 호기심이 존재하게 마련. 이곳도 예외는 아니어서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기념품점들이 닥지닥지 붙어 있었다. 북한 돈, 북한담배는 기본이었고 기타 우리로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물품들이 진열되어 찾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차림새는 수수한데 인심이 순하고 떼 묻지 않은 면모가 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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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은 검소한 옷차림이 대부분으로 열심히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신 먹는 것은 풍성했다. 보신탕이 이곳에서는 ‘개장국’으로 표현하고 있었는데 메뉴가 다양하고 우리 전통의 맛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우리가 투숙한 호텔도 상당히 깔끔한 시설이었는데 숙박비는 우리나라의 절반 정도였다.제공하는 조식도 우리 식성에 맞아 반가웠다. 여기에도 동원참치 횟집이 있었는데 메뉴가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우리나라보다 차림새나 맛이 우수한 것 같기도 했다. 차창을 통해 보이는 상점들은 모두 중국어와 한글이 동시에 표시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조선족 자치주의 의무사항이라고 한다. 간간이 ‘이가자미용실’ 등 한국 업체가 어느새 진출한 모습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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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시가 운영하는 ‘연길빈의관’은 생각보다 단순하고 초라했다. 넓은 부지에 군데군데 건물이 섰는데 기본은 화장시설과 빈소였다. 말이 빈소이지 칸칸이 구분된 좁은 공간에 고인을 모신 관 앞에서 유족 몇몇이 모닥불을 피워 놓고 예를 올리고 있었는데 그마저 화장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이었다. 건너편 건물 역시 좁게 구분된 접견실은 편의 시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집에서 상을 당하면 우선 유족과 친척들이 모여 십시일반 각자 협조해야할 것을 정한 후 장의차를 불러 이곳으로 모시고 온다고 한다. 그렇다고 별다른 장례식이 있는 것이 아니고 화장순서를 기다리는 수준이었다. 빈소내부를 잠간 들여다보았더니 이곳에서 빌려주는 둥그런 조화를 세워놓고 간단한 제수를 차렸으며 유족들은 검은 옷에 흰 띠를 두른 차림으로 경건하게 예를 올리는 모습이 보였다. 이곳에는 커피 한잔, 담배 한 모금 해결할 편의 시설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연길시에서는 이러한 현황을 바탕으로 조선족이 많이 사는 특성을 살려 한국식으로 장례를 치를 장례식장 시설과 각종 부대시설을 만들어 전통 한국식을 원하는 유족들의 바램을 충족시키고 나아가 각종 필요용품과 음식 및 기호품을 판매하여 매일 이곳을 찾는 수천명의 조문객을 대상으로 수익모델을 구축하자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해 관련 공무원들이 2,3차례 한국의 장례식장을 견학도 했다고 한다. 또 낙후된 화장시설을 현대식으로 리모델링하여 다소비용을 받고 제대로 처리해 주는 방안을 빈장관리처(장묘사업소)에서도 구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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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업 계약이 확실하게 신뢰성이 있어야 하고 이를 당국이 공식으로 인정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이 모두가 비교적 만족스러운 답이 나왔다. 어쨌든 우리 동족이 많이 살고 있는 중국 연길에 우리 장례문화가 확산되고 동포들이 그리운 모국의 전통예식에 따라 인생을 마감할 수 있다면 사업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상당한 의미를 부여해도 좋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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