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장례식이 결혼식 같은 예식이 되었지만 1980년대까지는 장례식을 집에서 치렀다. 돈암동이나 하월곡동의 못사는 동네는 한 집에 몇 가구씩 거주했고 공간이 좁았다. 어떤 집에서 상을 당하면 옆 방이나 집에서 방을 비워주고 집 앞 골목길에는 천막이 쳐졌다. 이웃집 아주머니들은 음식 장만이나 손님 뒤치닥거리를 했다. 당연히 그 집 아이들은 상가집에 와서 밥을 먹었다. 겨울철에는 길가에 연탄 수백 장을 쌓아놓고 난로를 땠다. 상가집에서는 밤새 고스톱과 술 판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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왁짝지껄한 상황에서 돌아가신 고인의 존재가 가름이 됐고 그 빈 공간이 누구에 의해 채워지는지가 결정이 되었다. 장례식이면서도 동네 축제의 분위기도 했다. 이런 장례문화를 가졌던 지역의 공동체에서는 이웃에게 잘할 수밖에 없었다. 동네 어르신의 권위는 매우 셌다. 담배피는 중•고등생은 동네 할아버지에게 들켜 꿀밤을 맞기도 했다.
각 나라의 문화의 정수는 장례문화에 체화되어 있다. 이 점은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지난 20여년 동안 한국의 장례 문화는 세계에서 유례를 볼 수 없을 정도로 급격하게 변했다. 장례식이 결혼식과 비슷해진 것이다. 이런 변화가 생긴 밑바닥에는 그만큼 커다란 사회 변화가 자리잡고 있다. 이런 장례식 문화의 변화를 볼 때 요즘 진보가 주장하는 골목 상권의 부활, 지역 공동체의 부활 운동은 피상적이고 관념적인 유희일 뿐이라 생각된다. [출처: 제3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