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IT, BT, 생명공학, 초연결사회, 융합이라는 용어들이 인류의 장밋빛 미래를 예언할 것처럼 올해 초까지 회자되고 있었다. 소위 ‘4차 산업혁명’이라는 화두가 언론, 산업 그리고 대학의 담론을 온통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21세기 위생의 개선, 의생명기술의 발전은 인간 수명을 두 번 더 살게 만들었다.
이런 과학기술문명의 성과에 안주하던 인류는 코로나19가 몰고 온 변화 앞에 멈추어 섰다. 그리하여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지역과 세대, 인종과 계층, 사상과 정치체제를 넘어서 공통의 문제를 함께 해결해야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과거에도 인류에 재앙을 준 바이러스 침입이 있었지만 코로나19처럼 국지적이 아닌 전세계적이며 빠른 전파속도를 가진 전염병 재앙은 없었다.
의사소통기술이 발전되지 않았고 글로벌한 경제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 14세기와 19세기의 흑사병 때는 물론이고 양차 세계대전 때도 무풍지대는 존재했으며 역사의 소용돌이 밖에서 일상을 영위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번 코로나19는 성별, 국적, 사회적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전방위적 전염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서 그 추이를 지켜보며 극복방안을 찾고 있다.
21세기 문명이 극복했다고 생각했던 전염병이 일상을 정지시키고 단번에 인류를 죽음이라는 한계상황과 무력감에 빠지게 한 이때, 영원할 것 같았던 자본주의 시장사회도 이 사회를 이끌던 선진열강들도 멈춰선 이 순간에, 인류는 서로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해 볼 기회를 맞은 것이다.
중세 후기에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은 당시 유럽 인구 1/3 이상의 목숨을 빼앗아갔다. 이처럼 무섭고 처참한 불행이었지만 흑사병은 유럽의 기존 지배체제를 크게 흔드는 동시에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시대가 등장할 여백을 마련하도록 했다. 흑사병이 촉발한 변화가 없었다면 인류는 과거의 세계에 더 오래 안주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르네상스도 없었을 것이고, 르네상스에 뒤이은 근대 과학혁명도, 또 과학혁명을 기반으로 전개된 산업혁명과 20세기 이후의 경제적 풍요도 크게 지체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대재앙이 비극일 뿐만 아니라 인류에게 새로운 방식의 삶을 촉구하는 계기로 작동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역사상 아무리 거대하고 견고한 것들일지라도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은 허점을 드러내며 해체되거나 재구성되었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대안을 찾아야만 할 정도로 현 체제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지, 자본주의 시장경제 외에 인류 역사상 이만한 번영과 자유를 대체해 줄 수 있는 다른 체제가 있을지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서 생명 위협의 문제 앞에서는 새로운 대안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코로나19가 종식되더라도 유사한 바이러스가 이제 주기가 짧게 지구를 엄습할 것이라는 예상은 이제 우리 삶의 조건과 방식, 관계망을 다시 한번 돌아보아야 하고 또한 세계열강이 주도하는 경제시스템과 사회안전망의 취약성을 보면서 새로운 대안을 찾아보아야 한다. 성찰과 회고를 통해 국경과 인종, 이념의 벽을 넘어서 세계시민들의 연대 필요성을 깨닫게 한다.
최승호 박사 프로필
약력: 독일 라이프찌히 대학교 사회정책학 박사
한신대 학술원 연구교수
현재 충북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주관심분야 : 노인복지정책, 고용과 사회보장, 생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