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말, 모 신문사가 개최한 무연고사망자 문제의 해결을 위한 좌담회가 있었다. 좌담회에는 정부 실무자, 학계, 시민단체가 함께 했고, 이들은 무연고사망자 문제를 단지 한 개인의 실패가 아닌 사회 구조적인 실패로 인식하고 국가 차원에서의 통계와 대책 마련, 그리고 필요한 입법도 고민해야 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의견이 모였다.
좌담회 중 ‘보편적 사회보장으로서의 장례’가 필요하다는 시민단체 활동가의 주장에 학계에서는 전 세계적으로 그런 사례는 없다고 지적했다. 그렇다. 아무리 사회복지가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구호를 외쳐도 실제 현실은 이상과 다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망 후 장례가 끝나고 무덤에 묻히는 순간까지, 국가가 모든 사람의 삶을 보편적으로 보장하겠다는 사회복지의 이상은 아직 갈 길이 먼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지금 당장 이뤄질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꾸준히 대안이 무엇인지 이야기해야만 그 상상이 현실이 된다.
생소하기만 한 ‘장례복지’
사회복지는 아동·청소년·노인·장애인·여성복지와 같이 대상을 기준으로 분류하기도 하고, 가족·학교·의료·교정·군·지역사회복지와 같이 분야를 기준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하지만 ‘죽음과 장례’는 사회복지의 한 영역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그래서 ‘죽음 복지’ 혹은 ‘장례 복지’라는 말은 생소하기만 하다. 관련 내용은 노인복지에서 다루는 정도로 취급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죽음은 꼭 노인에게만 닥치는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당연히 사회복지학계에서도 ‘장례’ 관련 연구는 드문 것이 현실이다. 한국교육학술정보원(RISS)에서 ‘장례복지’와 ‘장사복지’ 키워드 검색 결과는 이러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검색된 연구들은 정부 주도로 화장문화가 정착되는 과정에서 장묘제 개선을 위한 사회복지적 관점에 관한 연구(김영화, 1997), 화장·봉안·묘지 등의 장사시설을 복지시설로 규정한 연구(고수현, 2007), 장례복지 발전 방안에 관한 연구(이영달, 2012; 신동석, 2016; 최두훈, 2021), 장례복지와 사회복지사의 역할에 관한 연구(김석란, 2013), 국민기초생활수급자 장례방법 및 장례비용 결정요인 분석 연구(김재호, 2015) 정도이다.
우선 관련 연구가 드문 현실에서 연구자마다 사용하는 용어도 제 각기다. ‘장례복지’와 ‘장사복지’ 두 가지 용어가 동시에 사용되고 있다. 용어에 대한 확립뿐 아니라 이에 대한 개념 정의도 합의되지 않아 명확하지 않다. 결국 이러한 현실이 바로 현재 2021년 대한민국의 장례복지가 낯설고 생소할 수밖에 없는 현주소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장례도 복지다” 보편적 ‘장례복지’를 상상하며
[박진옥칼럼]생소하기만 한 ‘장례복지’/ ‘장례복지’가 필요한 이유/ 결국 산 사람을 위한 ‘장례복지’
‘장례복지’가 필요한 이유
전통사회에서는 죽음과 관련된 장례조직을 유지했다. 그리고 장례는 공동체에서 지위와 경제력과 상관없이 참여해야 하는 사회적 의무로 여겨졌다. 또한 상포계 등을 조직하여 상부상조하는 비공식적인 협력조직도 운영했다. 이로 인해 공동체 내에서 개인이 사망하였을 때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한 인구·가족구조 변화, 주거환경 변화로 장례업체의 서비스를 이용하는 방법으로 전환된 것이다. 이로 인해 한국의 장례 산업은 번성했지만, 빈곤을 이유로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즉, 장례는 오직 자본과 시장에 내맡겨져 있는 상황이고 장례에서 공공성을 찾기는 쉽지 않다. 이러한 현실의 대표적인 사례는 장례식 없이 화장장으로 바로 가는 무빈소 직장(直葬)이고, 또 하나는 무연고사망자의 급격한 증가다.
이 두 가지 현상의 공통점은 ‘빈곤’이다. 무빈소 직장(直葬)은 장례식을 하려고 해도 그 정도의 경제적 여유가 없어 가족들이 장례식을 포기했던 것이고, 무연고사망자는 고인과의 단절과 경제적 어려움 등을 이유로 가족의 시신 인수를 포기하게 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여기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은 ‘자유’라고 할 수 없다.
‘자유로서의 발전’을 쓴 아마티아 센은 말한다. 빈곤은 ‘부자유’라고 말이다. 가족이 돌아가신 가족을 위해 최소한의 장례를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부자유’한 상태, 시신 인수를 하려고 해도 포기할 수밖에 없는 ‘부자유’한 상태, 이것이 바로 빈곤이다. 감당할 수 없는 장례비가 죽음 앞에서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예의도 지키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자본 앞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사라지고 만다.
복지국가는 불평등을 내재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빈곤 문제에 대응하여 분배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고안된 방법이다. 그래서 태어나서 성장하는 동안, 질병 등으로 아플 때, 산업재해를 당하거나 실업 상태에 놓일 때, 나이 들어 치매에 걸려도 누구나 같은 사회보장 제도에 따라 국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죽음과 장례는 사회보장 제도에서 예외다. 현재 국가 차원의 장례복지는 「국민기초생활 보장법」에 근거한 80만 원의 ‘장제급여’와 「장사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른 무연고사망자 시신 처리, 그리고 장사시설에 대한 지원 등이다. 하지만 이러한 국가 차원의 장례복지는 충분한 사회보장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
결국 산 사람을 위한 ‘장례복지’
존엄한 삶의 마무리를 위해 장례복지를 주장하면 많은 사람이 “산 사람도 먹고살기 힘든데 죽은 사람까지 신경 써야 하냐?”고 되묻는다. 장례복지는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산 사람을 위한 복지이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있다.
첫째, 장례복지는 장례 자체가 걱정인 사람들의 죽음 불안을 경감시켜 줄 수 있다.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죽음 앞에서 불안과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래서 죽음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있다.
죽음 불안의 차이를 분석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직업이 없을수록, 지나온 삶의 만족도가 낮을수록, 죽음 준비를 못 할수록 죽음 불안이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서울시 거주 노인을 대상으로 한 죽음 불안 영향요인에 관한 연구에서 사회적 지지가 낮을수록 죽음에 대한 불안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실제로 홀몸 어르신들을 만나보면 죽음 불안의 근본적인 이유는 본인 장례를 어떻게 할지에 대한 걱정이다. 홈리스 분들 역시 죽음 후에 시신이 방치되어 민폐를 끼치지는 않을지 걱정하고, 또 누가 본인의 장례를 할지에 대해 걱정한다.
이는 다른 통과의례와 달리 장례는 당사자 본인이 직접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육체적 죽음만으로 죽음이 완결되지 않고 죽음의례인 장례를 통해서 비로소 하나의 삶이 끝맺는다는 인식 때문이기도 하다.
둘째, 장례복지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장례를 치러야 할 가족들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뿐만 아니라 장례를 통해 사별한 가족들이 고인을 애도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서울시 공영장례 현장에서 연고자들의 시신위임 사유의 많은 경우는 ‘경제적 어려움’이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가족의 장례를 치르지 못한 그 심정이 어떨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장례복지’는 일차적으로 죽은 사람의 존엄한 삶의 마무리를 위해 의미 있다. 또한 홀로 살아가며 단절과 고립으로 장례 할 사람이 없어 장례가 걱정인 사람들, 그리고 경제적 어려움으로 시신을 포기해야만 하는 산 사람들을 위한 복지이기도 하다.
코로나 펜데믹 이후 ‘장례복지’의 필요성은 사회적으로 더 요구될 것으로 예상된다. 누구를 대상으로 어떤 방식으로 사회보장을 해야 할지 지금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더는 장례 할 사람이 없어 불안해하고, 장례 할 돈이 없어 시신을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국가 차원의 사회보장 시스템을 정비해야 한다. 장례도 복지다.
※이글은 나눔과나눔에서 활동하고 있는 박진옥 상임이사가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