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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세상

보이지 않는 사랑   - 최호선 

 

TV에서 원조 아이돌 그룹이었던 핑클이 16년만에 만나 캠핑을 떠나는 프로그램을 봤습니다. 이십대 초반에 데뷔해서 큰 인기를 얻었던 네 명의 여성들이 이제 더 이상 젊다고는 할 수 없는 나이에 다시 만나 캠핑카를 타고 여행을 떠납니다. 낯선 곳으로 떠나는 여행은 함께하는 이들의 맨 얼굴을 보여주지요. 타인은 물론, 몰랐던 자신의 모습까지 발견하게 만들어줍니다. 

 

직접 운전, 요리, 설거지 등 모든 일을 하면서 지낸 여행기간 동안 핑클 멤버들은 젊은 시절에 몰랐던 서로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젊은 시절 같이 활동할 때는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는 이효리, 이진 두 사람은 의외로 잘 맞는 짝꿍이 됩니다. 재치 넘치는 이효리씨가 아침 산책 파트너 이진씨에게 “수잔”이라는 별명을 붙여 줍니다. “수시로 잔소리”리를 한다고 해서 수잔이래요. 잔소리 많다고 지어준 별명이지만 이진씨도 수잔이 싫지 않은지 같이 깔깔 웃습니다.그 장면을 보면서 장례지도과에서 강의를 할 때 학생들에게 자주 들려주던 수잔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핑클의 수잔이 아니라 미국의 수잔 이야기 입니다.

 

직장에 다니던 수잔은 어느 날 갑작스러운 사고로 맹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공군 장교인 남편이 아내의 직장 출퇴근을 매일 도와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남편도 출근하면서 아내의 출근길을 매일 돕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수잔이 출퇴근에 익숙해질 무렵에 남편이 말했습니다. "여보, 언제까지 내가 계속 이렇게 할 수 없으니 내일부터는 혼자 출근을 하도록 해요." 이 말에 수잔은 믿고 의지했던 남편에게 큰 배신감을 느꼈고, 상처를 받았습니다. 

 

수잔은 이를 악물고 그동안 익힌 것을 더듬으며 혼자 출퇴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내리며, 횡단보도를 건너고, 사무실 계단을 올랐습니다. 여러 번 넘어지고 지나가는 사람들에 부딪히며 서러움에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하지만 차츰 출퇴근이 익숙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잔이 버스를 탔을 때, 운전기사가 무심코 말했습니다. "부인은 참 좋겠어요, 좋은 남편을 두셔서요. 매일 한결같이 부인을 살펴 주시니까요." 그랬습니다. 남편은 매일 아내가 버스를 타면 뒤따라 탔습니다. 아내 곁에 앉고, 아내 옆에서 걸었답니다. 말없이 아내의 출퇴근을 변함없이 지켜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내가 홀로서기를 해내기까지 곁을 지켰습니다.

 

장례지도과를 졸업한 학생들은 대부분 장례지도사라는 직업을 갖게 됩니다. 장례식장에서 근무하면서 고인의 염습과 입관 등 예전에는 장의사가 하던 일을 하는 전문 직업인이 되지요. “시체 닦는 일“은 흔히 가장 천하고 어두운 직업을 의미했습니다. 우스개말로 시체 닦는 아르바이트는 일당이 세다고 했었지요. 세상에 아무렇지도 않게 떠도는 이야기 중에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시체 닦는 알바“도 그 중 하나입니다. 

 

 

고인을 모시는 일은 동서고급을 막론하고, 가능한 최선을 다해서 예의를 갖추는 일이었습니다. 옛사람들은 죽은 이가 마지막으로 입게 되는 수의를 만들 때도 격식을 갖추었습니다. 옷을 만들 때는 마을에서도 솜씨 좋다고 소문난 아낙네들만 뽑아서 일을 맡겼습니다. 단순히 바느질 솜씨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성품이 온화하고 집안에 궂은 일이 없는 여인들만 수의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볕이 좋은 대청마루에 아낙네들이 모여 앉아 수의를 짓는 풍경을 본 적이 있습니다. 죽은 이가 입을 옷을 짓는다고 해서 슬프고 엄숙한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여인네들 특유의 입담으로 잠시도 쉬지 않고 수다를 떨면서 즐겁게 바느질을 하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렇게 정성껏 지은 옷은 벌레가 침범하지 않도록 종이나 나무로 함을 만들어서 소중하게 보관합니다. 날씨가 좋을 때는 마당에 내걸어서 바람과 햇살로 바삭하게 말리기도 합니다. 겨우 옷 한 벌에도 이렇게 정성을 기울이는데 사랑하는 사람의 몸은 오죽 할까요 !

 

예전에는 향나무를 달여서 식힌 물로 고인의 몸을 닦았습니다. 요즘 장례식장에서는 알코올을 묻힌 솜으로 깨끗이 닦아드립니다. 이 과정이 지나면 몸이 반듯해지도록 자세를 잡아드리고 난 후에 마지막 옷을 입힙니다. 대부분 전통적인 수의를 선택하지만 요즘은 평소에 가지고 계시던 한복이나 더러 양복을 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인에게 옷을 다 입히고 나면 얼굴을 매만져 표정을 편안하게 해드리고 머리를 깨끗이 빗겨줍니다. 간혹 고인의 얼굴에 화장을 하는 경우도 있지요. 외국에서는 화려하게 치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더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요란한 화장이 아니라 안색이 밝아 보이도록 피부를 정돈하는 정도에서 그칩니다. 고인이 여성인 경우에는 눈썹을 단정하게 그리고 입술에 약간의 윤기를 더해 주기도합니다.

 

고인의 몸을 씻기고, 옷을 입히고, 얼굴을 단정하게 매만져 주는 직업을 갖게 될 제자들에게  “수잔의 남편”같은 마음으로 그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합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고인을 보살피는 일은 사랑과 연민이 없으면 하기 힘이 들기 때문이지요. 고인과 유족들에 대해서 존중과 연민의 마음을 가지고 일하지 않는다면 장례지도사는 끔찍하고 두려운 직업 일수도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신입생들이 전공을 선택한 이유를 들어보면 업무의 특성을 잘 알고 저마다 소신도 뚜렷합니다. 

 

매일 돌아가신 분들과 슬퍼서 울부짖는 유족들을 봐야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꽃집주인이나 식당 주인이 되고 싶었던 적이 있지요. 아름다운 꽃들 속에서 하루를 보내거나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서 손님을 대접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상상해봤습니다. 그 이야기를 꽃집 친구한테 했더니 손 사레를 칩니다. 아름다운 꽃 한 송이를 위해서 농부는 가시에 찔리고 농약 냄새를 맡아야 한답니다. 맛있는 음식 한 접시 근사하게 차려내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을 보고, 다듬고, 요리하고, 뒷 정리까지 하는 것이 하나의 과정입니다. 저는 보이지 않는 수고로움을 짐작하지 못하고 단지 식탁 위의 맛있는 음식만 보면서 요리하는 사람은 행복하겠다고 착각을 했습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참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 전반에 직업의 귀함과 하찮음을 가르는 시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제자들에게 수잔의 다정하고 사려 깊은 남편 이야기를 해주는 이유는 그들이 이미 죽은 사람들을 보살피는 직업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은 과묵하게 누워 있습니다. 취향을 내세우거나 고집할 수 없습니다. 낯선 이의 손이 몸에 닿아도 거부할 수 없으며 입힌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벗어 던질 수도 없습니다. 미소를 짓거나 화를 내지도 못합니다. 그들은 눈 먼 수잔 보다 더 가엾은 처지입니다.

 

나의 죽음을 상상해봅니다. 어느 날 숨이 끊어지고 몸이 식어 어느 장례식장 안치실 한 칸을 차지하고 눕게 되겠지요. 누구나 보류시키고 싶은 일이겠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온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요. 그 서늘한 상상 속에서도 존중과 연민의 마음으로 보살피는 손길이 있다면 조금은 안심이 되지 않을까요?

 

학생들에게 수잔의 남편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헌신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가르치면서 제 자신도 소화데레사 성녀님의 말씀을 한 번 더 되새깁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때, 기도하지도 좋은 일을 하지도 못할 때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미소를 지으며 친절한 말 한마디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순교보다 더 위대한 일입니다.“ 

 

죽음은 저에게 “친절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글 : 최호선 심리상담센터 '너머' 대표/ 전 대전보건대학교 장례지도과 겸임교수) 

 

[출처 : 가톨릭평론 11,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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