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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특집] 지구촌 곳곳마다 자랑스런 동포들

스마트폰시대 고향의 변화/고속철도시대 고향의 천지개벽/그러나 지금도 변함없는 효성/

이 글은 고국을 떠나 지구촌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의 모습과 그중에도 놀랍게 변한 연길지역 삶의 모습, 그래도 한 가지 변함없는 부모에의 효성 등 등 한국땅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이 칼럼을 쓴 사람은 미국에 정착하며 길림신문 특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동포 여성 언론인이다 -편집자 주]​​​​

 


                                                   

[미국특파원의 고향방문기7]  꿈같은 고향나들이 단상


오늘날 세상은 5G 시대에 들어섰고 세계는 하나의 지구촌을 이루고 있다.

나한테 가정용전화기가 절실했던 시대는 불과 25년전의 일에 지나지 않지만 먼 옛날 얘기처럼 고리타분하게 들린다.

 

<스마트폰 시대>를 맞이한 고향의 변화는 실로 놀라웠다.

중국 연변에서 모바일의 혁신적인 변화를 적극 흡수하고 신속하게 활용하는 면에서 적어도 내가 살고 있는 미국 동남부보다 앞서고 있었다. 위챗 페이, 알리페이로 거의 모든 결제를 깔금하게 끝내는 것에 비해 미국에서는 아직 애플페이 보급률이 그닥 높지 않다. 대부분 미국인들은 신용카드를 가장 많이 리용하고 있고 현금, 첵(수표)을 리용하기도 한다.

 

 

우연히 우체국에 작은 소포 하나 부치러 갔는데 주소를 쓰는 전문용지가 보이지 않았다. 점원한테 물어 보았더니 어이 없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수신인 주소가 입력된 나의 스마트폰과 영업용스마톤을 접속하더니 신속하게 주소 라벨을 프린트 해 내는것이었다. 아직 펜으로 주소를 써야 하는 미국 우체국에 비해 고향의 변화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다시 한번 주소를 확인하면서 왜 중요한 우편번호를 빠뜨렸냐고 물었더니 점원은 필요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고속철도 시대>가 열린것은 그야말로 고향의 천지개벽의 변화였다.

중국이라는 큰 대륙에서 동북의 어느 한 작은 변방도시에 불과한 연변에 사통팔달한 고속철도가 성공적으로 개통되었다는것은 실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수 없다. 미국에서 중요한 교통수단은 자가용이기 때문에 웬만한 출장이나, 여행시에는 모두 자가용이나 렌트카(임대한 차)를 직접 운전하고 다녀야 하며 아주 먼거리는 항공편을 이용한다.

 

 

<마이카 시대>(나의 차 시대)를 맞이한 고향에서 자가용은 경제적으로 급성장한 부의 상징이었다.공공뻐스같은 대중교통수단이 발달되어 있고 손만 흔들면 택시가 쏜살같이 달려오고 특별히 이동거리가 가까운 연길시내 안에서 마이카 붐이 이루어지면서 교통체증이 심각해지고 있었다. 자가용의 증가는 어느 정도 거품도 있겠지만 10년 사이에 물질적으로 고도성장이 계속되면서 고향 사람들의 생활과 의식도 급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차가 없으면 발이 묶인거나 마찬가지여서 생활에 불편함을 느낀다. 때문에 16세에 예비운전면허증을 취득하고 조수석에 앉은 부모의 도움을 받아가며 운전을 시작하다가 17세부터는 혼자서 운전을 하게 된다. 주택에서 살다보면 제일 가까운 동네 슈퍼마켓에 나가려고 해도 10분정도 운전거리는 보통인 미국에서 자가용은 생활필수품이다.

 

거리 곳곳에 <배달오토바이>가 많아졌고 레스토랑에서 웨이터들이 스케이트보드를 씽씽 타고 다니며 써빙하는 모습과 로보트가 쫑쫑 다니며 써빙하는 모습들에서 서비스업이 날로 발달해가고 있음을 목격할 수 있었다.

 

 

택시보다는 조선말, 중국말 안내방송이 흘러나오는 공공뻐스에서 고향사람들의 구수한 연변사투리에 귀기울이며 그들의 정서와 삶의 향기를 다소나마 느껴가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문명한 연길사람이 되어 전국 문명도시를 건설하자”는 연길시의 모토로 시작되는 안내방송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새롭게 다시 건설된 서시장이며 북대시장, 아침 수상시장을 한바퀴 돌아다니다 보면 고향은 정말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먹거리가 대단히 풍부하다는것을 재삼 실감하게 된다. 동시에 한족들이 조선족에 비해 장사에 발벗고 나선 비률이 높아졌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한국에 나가 있는 친구가 “어떻게 대림동에서까지 한족들이 조선족들보다 더 많이 장사에 뛰어 들수 있지?”라고 하던 진지한 물음속에 담겨져 있는 깊은 뜻을 새삼 음미해 보게 된다.

 

12년 사이에 급속히 발전변화하는 고향의 추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손님을 뜨겁게 반겨주고 풍성하게 대접하는 고향의 넉넉한 인심과 풋풋한 정서 그리고 친구들사이의 따뜻한 우정은 변함이 없었다. 짧게는 12년, 길게는 37년, 그 동안의 만남의 공백이 너무 길어서 어색하지나 않을까, 서먹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도 없지 않아 있었다.

 

하지만 초중, 고중, 대학그룹의 동창들을 만날 때마다 <동창>이라는 이름의 매력앞에서 마치 세월이 그때 그 자리에서 멈춰 버린듯 어제 만난 친구처럼 친근감을 느낄수 있었고 마음껏 회포를 풀며 소중한 우정을 돈독히 하며 웃음꽂을 피워갔다.

 

 

아울러 교원시절의 동료친구들이며 지인들, 특히 이번에 새롭게 만난 길림신문사 사람들과의 상봉 등은 내 생애 짧은 일정가운데서 가장 많은 사람들을 만났던 가슴 설레는 순간들이었고 행복한 나날들로서 아름다운 추억들을 듬뿍듬뿍 쌓아갔다. 매 그룹마다 매 한사람마다 모두 자기만의 독특한 색깔들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런 다양한 색깔들이 칠색무지개처럼 아우러져 나의 인생을 보다 아름답고 풍요롭게 장식해 주고 있음에 깊이 감사할 따름이다

 

급변하는 세월속에서도 변함이 없는 또 한가지, 우리 친구들의 부모님들에 대한 효성이었다.

그중 한 명은 시집와서 오늘 이날까지 30년 간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효부로서 내가 연길에 도착하던 날이 마침 시어머님 구순잔치여서 공항에 마중 못나간다고 메시지를 보내 왔다. 또 한 명 효녀친구는 퇴직하기 바쁘게 날마다 친정에 출근하며 병환에 계시는 엄마를 돌봐드리느라 아쉽게 진달래축제며 훈춘관광을 함께 가지 못하고 저녁시간에만 만날수 있었다. 다른 한 친구는 89세되는 친정엄마를 모시고 늘 연변각지 가까운 곳에 자주 놀러도 다니고 사진도 함께 찍고 맛있는 음식도 대접해드리는 효녀이다.

 

 

그외에도 두만강 관광을 함께 간 대학친구 중 한명은 친정아버지를 돌보아 드리는 효녀, 다른 한명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효부이다.  <효>개념이 갈수록 흐릿해지고 진부한 것으로 취급되는 현대사회에서도 나에게 이런 효부, 효녀 친구들이 많다는 것이 무척 자랑스럽다. 또한 내가 고향에서 하고 싶었지만 할수 없었던 일들을 해내는 우리 친구들이 못내 존경스럽다. <마지막 만찬>을 나누면서 “이번에 진달래 축제에 다녀왔으니 다음엔 황금계절 시월에 와서 사과따러 함께 가자”는 친구들과의 친밀한 우정의 약속을 언젠가는 꼭 지키고 싶다.


글로벌시대를 맞아 지금 둘째 언니는 상해에서, 셋째언니는 동경에서 손주들을 돌보고 있고 큰 언니는 서울에, 나는 미국 탈라하시에서 네 자매가 중국, 한국, 일본, 미국 등 네 나라에 흩어져 “이산가족”으로 살고 있다.  떠나오던 날 고향의 특산물이며 산나물이며를 정성껏 진공포장하여 여행가방이 넘쳐나도록 넣어주던 엄마같은 큰언니, 공항에서 나의 손을 꼭 잡고 “우리 막내 다시 오는 날, 네 자매들이 다시 모일수 있겠는데 …” 하던 간절한 그 소원을 언젠가는 꼭 이루어 드리고 싶다.

 

바쁜 출근시간임에도 어렵게 청가까지 맡고 공항에 나와서 아쉬운 석별의 정을 뜨겁게 나눈 친구들을 언젠가는 꼭 다시 만나고 싶다. 나는 오늘도 꿈같은 고향나들이의 소중한 추억을 고이 간직하고 비상의 나래를 활짝 펼친 자랑스러운 고향의 내일의 변화와 정다운 친지들과의 가슴 뛰는 또 다른 만남을 아름답게 그려보며 기대감에 부풀어 있다.

 

미국에서 이방인으로 살면서 나는 나의 본분과 천직을 잊지 않고 아들딸에게 조선말과 글을 가르쳐왔고 가정에서는 언제나 조선말로 대화하면서 오늘도 발 붙이고 있는 이 땅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그리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글: 리화옥 길림신문 미국특파원) 

[출처 : 길림신문]
 

 

 

[참고화보]  연변대학 직업여성문화연구반 창립 20주년 기념 공연 모습

(2019.9.4) [출처 :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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