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를 풍미했던 패션디자이너 노라노의 첫남편이었던 신응균 장군은 무척 흥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회고는 ‘정말 미남이고 잘 생겼다’였습니다. 실제로 노라노가 16살에 중매로 혼담이 진행될 때 24살의 남편을 처음 보고 너무 잘생겨서 깜짝 놀랐었다고 회고할 정도로 당시 기준으로 정말 ‘송중기’급이었던 것 같습니다.
신응균은 일본육군사관학교 53기로 1940년에 포병 소위로 임관하여 육군과학교를 졸업하고 대본영에서도 잠시 근무한 적이 있는 촉망받는 청년장교였습니다. 주로 참모장교나 교관으로 근무하였던 것으로 보아 영민한 신응균을 일본군 내에서도 무척 아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린 신부가 힘들어할까봐 “부부생활은 당신이 좀더 성장하면 하기로 했어요. 됐나요?”라고 말해줄 정도로 다정하고 배려심이 많았던 남자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신혼생활은 길지 않아서 소속 중포부대가 오키나와로 출정을 하면서 생이별을 하게됩니다. 노라노는 당시 전장에 나갔던 34명의 중포부대 장교중 단 2명만 살아서 돌아왔다고 회고록에 기록하였습니다.
신응균이 소속한 중포부대는 미군이 상륙하자마자 압도적인 화력에 궤멸되었고 살아남은 소수의 병사들을 이끌고 산으로 들어가 미해병대와 게릴라전투를 하였고 부상을 입고 죽어가는 중에 일본인 여성에게 구조되어 그녀의 간호를 받고 겨우 살아납니다. 그리고 1년간 은거에 들어갑니다.
1946년에 미군이 조선인들은 한국으로 보내준다는 소문이 돌면서 “당신을 이제 아키코 짱에게 돌려줘야 해요.”라며 생명의 은인은 그를 보내주었습니다. 미군에 출두하여 전쟁범죄에 대한 재판을 받고 무죄석방되어 밀린 급여를 받은 후 아내에게 돌아갔으나 이미 이혼이 진행되고 있었다고 합니다. 노라노의 주장으로는 시댁에서 전사자연금 때문에 며느리에게 이혼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서로 헤어질 때 남편에게 “다시는 군인이 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라고 말했고 신응균은 군인이 아닌 진명여고 수학교사로 제2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전운이 감돌면서 육군사병으로 입대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일본군 시절의 속죄라며 장교임관을 하지 않았으나 군 수뇌부의 강권으로 임관을 하고 한국군 포병의 체계를 만들어 한국군 포병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참모학교 유학을 하고 중장으로 예편하여 외교관의 길을 걸었고 서독대사 시절 광부와 간호사 파견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국방과학연구소의 초대 소장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명을 받들어 지대한 공헌을 하였고 이후에 한국과학계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신응균은 지금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가 있습니다. 20대 초반에 일본군대 근무를 이유로 친일파로 죽어서도 오욕을 당합니다. 광복 후 70여년이 지난 이후에도 친일청산을 외치는 것이 순수한 의도일까요? 정치적 반대파들을 엮어서 명예살인하는 용도로 사용되는 것은 아닐까요? 분명한 점은 박정희나 신응균이 태어날 시점에는 조선이라는 나라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광복이 우리 힘으로 된 것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핀란드의 영웅 만네르하임이 제정러시아 육군에서 근무하였다고 모욕하는 핀란드 인은 없습니다. 요르단의 후세인국왕이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고 불명예를 겪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모습을 냉정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글: Zachäus Sük) [출처: 제3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