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인간의 마지막은 그의 죽음과 유택이다. 일세를 풍미하던 영웅호걸이나 평범한 시정 백성이나 다를 바 없이 그 일생의 흔적은 오직 그의 무덤이 말해 준다. 후세대가 선대의 무덤을 소중히 하는 이유도 이를 통해 그의 자취를 상세히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국내만 해도 수천 만기가 넘는다는 개개인의 무덤들도 모두 소중한 흔적이 될수 있는 것이다. 최근 인기 드라마를 통해 새삼 부각되는 역사적 인물에 '기황후'가 있다. 그녀의 출생지라고 하는 연천군 소재 연천문화원은 그녀의 무덤이 연천군에 있다고 발표했는데 이를 계기로 '무덤'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의미에서 그의 일생을 간단히 재조명해 본다.
최근 인기 텔레비전 드라마 ‘기황후'의 영향으로 경기도 연천군에 있는 것으로 전해지는 '기황후' 묘지가 새삼 이목을 끌고 있다. 연천군은 연천읍 상리 산145번지에 위치한 지금은 밭으로 변한 조그마한 야산이 기황후가 잠들어 있는 곳이라고 밝혔다. 연천군에 따르면 연천읍 상리 산 145번지 야산에 중국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가 순제의 황후가 된 '기황후'(중국명 완췌후두ㆍ完者忽都)가 묻혀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묘지의 흔적은 현재 사라져 없지만 기황후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공식 문헌으로도 남아있다.
조선 영조 때 간행된 동국여지승람은 `연천현 동북쪽 15리에 원나라 순제 기황후의 묘와 석인, 석양, 석물 등이 있다'고 밝혔다. 1899년 간행된 연천현 읍지는 `황후총은 동쪽 20리 재궁동(齋宮洞)에 있는데, 세속에서 전하길 원 순제 기황후가 고국에 돌아가 묻히기를 원해서 이곳에 장사 지냈다'고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연천문화원은 이를 근거로 1995년 지표조사를 실시, 주변에서 나뒹구는 석물(石物) 2기를 수습하여 문화원 뜰 앞에 옮겨 놓았다. '기황후' 묘소 주변에는 고려양식의 어글무늬 기와가 많이 발굴된 점도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기황후 묘'는 지난해 연천군 향토 문화재로 지정됐다. 기씨 종중이 이 터를 가끔씩 찾아 관리하고 있으며 2008년에는 후손인 당시 주한몽골대사가 찾기도 했다. 지난달 21일에는 이곳에서 행주 기씨 종중과 함께 기황후에게 차를 올리는 헌다식(獻茶式)을 거행하기도 했다.
이기환의 ‘흔적, 그리고 역사/ 기황후가 퍼뜨린 고려판 소녀시대’ 란 글을 통해 본명이 기순녀인 그녀가 원나라로 공녀로 끌려가 황후가 되고 한류의 원조가 된 발자취를 다시 조명해 본다.
“공녀로 뽑히면 부모친족이 모여 밤낮으로 웁니다. 공녀로 가는 날 옷자락을 부여잡고 끌다가 난간이나 길에 엎어집니다. 울부짖다가 너무 비통하여 우물에 몸을 던지거나 스스로 목을 매 죽는 자도 있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원나라의 간섭이 극에 달했던 1335년. 고려 문신 이곡(李穀·1298~1351)이 상소문을 올린다. 원나라가 강제로 뽑아가는 공녀(貢女)들의 피맺힌 사연을 호소한 것이다. 여인 자체가 ‘공물(貢物)’이라는 뜻이니 얼마나 비극적인가. 공녀를 선발할 때면 고려 전역은 공포의 도가니로 변했다. 왕의 호위부대는 전국의 민가를 이잡듯 뒤졌다. 여염에서는 젖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어린 딸을 시집보냈다. 위장결혼도 서슴치 않았다. 급기야 조정은 ‘13~16세 여성의 금혼령’까지 내린다.
우여곡절 끝에 끌려간 공녀의 숫자는 수백명~2000명에 이른다. 원나라행 가마를 탔을 어린 소녀들의 애끊는 심정을 표현한 시가 있다. 당대의 무신인 김찬(金贊)의 동녀시(童女詩)다.
“공녀를 뽑는 저 눈길을 어찌할꼬./(중략)/부모의 나라가 멀어지니 혼(魂)이 끊어지고/황제(원나라) 궁성이 가까워지니 눈물이 비오듯 하누나.”
끌려간 소녀들의 상당수는 불행한 나날을 보냈다. 고된 노동과 성적인 학대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온갖 역경 속에서도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한 여성들도 많았다. 기자오(奇子傲·1266~1328)의 막내딸 기씨가 바로 그런 여인이었다. 소녀가 공녀로 끌려간 것은 14살 꽃다운 나이 때인 1333년이었다. 소녀의 첫 직책은 원 황제 순제(재위 1333~1372)의 차와 음료를 주관하는 궁녀였다. 소녀는 단번에 황제의 넋을 빼앗는다. 원나라 궁정의 비사를 담은 장욱(張昱)의 <원궁사(元宮詞)>를 보자.
“기황후는 은행나무 빛 얼굴에 복숭아 같은 두 볼, 버들가지 처럼 한들한들한 허리로 궁중을 하늘하늘 걸었다.”
<원사(元史)> ‘후비열전(后妃列傳)’에는 “기씨가 지극히 영민하고 총명하다”고 기록돼있다. 기씨가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 하자 황후(타나시리·答納失里)의 질투가 하늘을 찔렀다. 채찍으로 때리고, 심지어는 인두로 지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기씨가 황제의 아들(아요르시리다라·愛猷識理達臘)을 낳자 반전드라마의 주인공이 된다. 타나시리 황후 일족이 축출된 이후 제2황후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의 아들은 황태자로 책봉된다.(1353년) 기황후는 마침내 대원제국의 안방마님이 됐다.
그러자 원나라에는 ‘고려열풍’이 분다. 권형(權衡)의 <경신외사(庚申外史)>와 <원궁사>는 고려판 ‘한류’의 열풍을 생생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연경(원나라 수도)의 고관대작이라면 고려여인을 얻어야 명가(名家)라는 소리를 들었다. 고려여인은 상냥하고 애교넘치며 남편을 잘 섬겼다.”(경신외사)
“궁중에서 가장 유행하는 옷은 고려풍 옷이라네. 정방형 목선과 짧은 허리, 반소매…. 궁중여인들이 다투어 고려여인의 옷을 구경하러 가네. 고려여인이 황제 앞에서 입는 옷이라네.”(원궁사)
또 궁중에서는 고려여악(高麗女樂) 열풍이 불었다. 기황후의 영향 아래 특출한 외모와 재주를 지닌 여성들을 뽑아 가무를 배우게 한 것이다. 이 여인들은 원 제국에는 고려의 대중문화 열풍을 일으킨, 한류스타였던 것이다. 다시 장욱의 시를 보자.
“보초 서는 병사들은 고려언어를 배우네. 어깨동무 하며 낮게 노래 부르니 우물가에 배가 익어가네.(衛兵學得高麗語 連臂低歌井卽梨)”(연하곡서·輦下曲序)
이처럼 고려의 대중가요가 세계를 호령했던 원나라 군인들에게도 대유행했다. 마치 <소녀시대>가 전세계에 K팝 열풍을 이끌 듯이…. 하기야 K팝의 K가 코리아, 즉 고려 아닌가. 경기 연천군 연천읍 상리에는 심상치 않은 마을이름과 무덤이 있다. 재궁동(齋宮洞)과 황후총(皇后塚)이다. 원나라의 멸망기에 행방이 묘연해졌던 기황후가 죽은 뒤 고향에 묻혔다는 곳이다. 1656년 편찬된 <동국여지지> ‘연천조’ 등에는 “기황후가 연천현 동북쪽 15리에 기황후의 묘가 있고, 지금은 석물(石物)이 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1990년대 중반 향토사학자인 이우형씨가 다 쓰러져 가는 무덤가에서 석물 2기(사진)를 수습했다. 물론 이 무덤이 진짜로 기황후의 것인지는 확정지을 수 없다.
<또 다른 이야기>
야심과 복수의 화신이 된 '기황후'
그는 흥성궁(興聖宮)에 거주했다. 그곳에는 황후 부속기관인 휘정원이 있었는데, 그는 자정원(資政院)이라고 이름을 바꿔 세력기반으로 삼는다. 정치의 바탕을 만들겠다는 그의 야심이 그 이름 '資政'에서 보이는 듯하다. 고용보가 제1대 자정원사로 임명된다. 자정원은 차츰 기황후를 추종하는 '팬'들(여기에는 고려 출신 환관뿐 아니라 몽골 출신 고위관료도 있었다)의 조직으로 발전해 '자정원당'이라는 정치세력을 형성한다. 기황후는 자신의 정치적 앞길을 막는 세력은 가차없이 처단했지만, 협조하는 사람들에게는 너그러웠다. 빠앤의 조카였던 토크타가(脫脫)를 유배지에서 불러들여 중서성 우승상에 임명한 것은 그런 '자비정치'를 통한 우군 만들기였다. 1353년 기황후의 아들 아유시리다라는 14세의 나이로 황태자에 책봉된다. 또 고려 출신 환관 박불화에게 군사 통솔 최고책임자인 추밀원 동지추밀원사를 맡긴다. 인연에 대한 보답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자신이 믿고 맡길 만한 군사적 배후가 필요했던 점도 있었을 것이다.
고려 여인이 최고 권력이 되자 원나라는 풍속이 바뀌기 시작한다. 고려에서는 몽골 변발과 족두리, 남녀 옷고름에 차는 장도, 신부 연지가 유행하던 때에 오히려 몽골 수도 한복판에서는 고려 패션이 유행한다. 그것을 고려양(高麗樣)이라고 불렀다. 기황후는 고려 공녀들 중에서 미인들을 뽑아 원나라의 고관들에게 보냈다. 그래서 고려 여인을 얻지 못한 사내는 권력도 아니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궁중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절반 이상이 고려 여인이었다고 한다.
원나라의 상황이 이렇게 되자 고려에 있는 기황후의 친정 또한 위상이 전혀 달라졌다. 이미 사망한 부친 기자오는 영안왕에 봉해지고 장헌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어머니 이씨에게는 대부인이라는 작위가 내려왔고, 집 문에는 '정절(貞節)'이라는 정표가 세워진다. 기황후의 오빠인 기철은 원나라로부터 정동행성 참지정사에 임명되고 고려로부터도 덕성부원군에 봉해졌다. 또 다른 오빠인 기원은 원나라 한림학사 벼슬을 받는다. 원나라의 순제는 1351년 재위 3년 된 충정왕을 폐위하고 공민왕을 즉위시킬 만큼 고려 왕실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런 시절이니 기철의 오만함은 극에 달했다. 1353년 기황후의 어머니 대부인 이씨를 위한 연회가 열렸다. 공민왕이 기황후의 아들인 황태자 아유시리다라를 향해 무릎을 꿇고 잔을 올리는 것을 보고 기철은 기고만장해졌다. 왕과 나란히 걷기도 하고 자신을 신하로 부르지도 않았다. 동생 기주ㆍ기륜, 조카 기삼만 등 친족은 일반 백성의 아내와 땅을 빼앗아 원성을 샀다.
오빠를 죽인 공민왕에 분노하는 기황후
1356년 5월 중순 공민왕은 기철 일당이 역모를 꾀한 혐의를 잡고 전격적으로 숙청해버린다. 그들의 목이 궐 밖에 던져질 때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다고 한다. 공민왕은 기철을 죽인 뒤 고려에 설치한 원나라 기관(정동행성이문소)를 없애고 원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원에 빼앗긴 옛 땅을 찾는 일을 추진했다.
고려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지자 기황후는 복수를 결심한다. 그동안 원나라에서 고려인의 공녀 관행을 폐지하고 고려를 원의 성(省)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무산시키는 등 고려를 위해 나름으로 애쓴 바 있었으나, 집안이 멸족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그는 황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이만큼 장성했는데 어찌 어미의 원수를 갚아주지 않습니까?"
1364년(공민왕 13년) 원 황제는 공민왕을 폐한다고 발표하고 충선왕의 셋째아들 덕흥군을 왕으로 책봉했다. 그리고 최유에게 1만명의 군사를 주어 압록강을 건너게 했다. 원병(元兵)은 최영과 이성계의 군사에게 대패하고 돌아갔다. 서서히 약체가 되어버린 원나라는 고려를 현실적으로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기황후는 정파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화합을 역설했고,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선정을 행하였다. 1358년 대도(大都)에는 큰 기근이 들었는데, 기황후는 관청에 명령을 내려 죽을 쑤고, 자정원에서는 금은ㆍ포백ㆍ곡식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그리고 10만명이 넘는 아사자를 위해 장례를 치르고 영혼을 위로하는 큰 모임도 열었다. 기황후의 이 같은 활약 이면에는 원 왕조 말년의 무기력이 엿보인다. 그 많은 인원이 굶어 죽도록 방치한 것은 결국 권력 자신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주원장(명나라 태조)을 비롯한 한족의 봉기도 점점 잦아지고 있었다.
기황후는 무능한 황제를 바꿔야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그의 감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자정원사가 되어있던 박불화는 황후의 지시를 받고 황제에게 양위를 건의한다. 순제는 깜짝 놀라며 그럴 수 없다고 저항한다. 황제는 황후의 아들인 황태자 아유시리다라에게 중서령 추밀사 직책과 군사권을 주겠다고 타협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에게 기황후 세력을 통제할 힘은 이미 없었다. 어사대부 불가노가 박불화를 탄핵했다 도리어 귀양가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1365년 제1황후가 세상을 뜬 뒤 기황후는 25년 만에 원나라 제1황후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소원을 이뤘을 무렵, 나라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이 기울어져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정파들의 내분은 그치지 않았다. 1년 뒤 원 제국은 주원장에게 쫓겨 대도를 버리고 북쪽의 몽골초원으로 옮겨가야 했다.
경기도 연천읍에는 '기황후의 묘'라고 불리는 오래된 묘가 있다. 공민왕 이후 원나라와 고려의 관계를 생각할 때 기황후가 이곳에 묻혔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보인다. 그러나 기황후가 고려를 못 잊어 유골이라도 귀향하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고, 그래서 일부 유골이 이곳에 묻혔을 수 있다는 '스토리'는 애틋한 여운을 준다. 열다섯 살에 사지(死地)로 내몰리듯 국경을 넘어갔던 공녀의 길. 문득 대국에서 영화를 누리고 다시 주검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와 묻히는 일. 여기에는 삶의 무상과 기구한 순환을 살펴보게 한다. 고려가 버린 여인이 고려를 위협하는 대국의 정상이 되었던 것도 아이로니컬하지만, 그녀의 형제들이 졸지에 생겨난 권세를 믿고 저지른 행악(行惡) 때문에 역경을 헤쳐나간 기황후의 빛나는 투지와 고려에 대한 애국적 선의(善意)조차 도굴 당한 무덤처럼 휑하니 도굴 당한 것도 우습다. 원나라는 그 수많은 고려인을 거대한 육식동물처럼 삼켰지만, 결국 그들의 몸 속으로 파고든 고려인이 뇌를 지배하고 손발을 지배하여 숙주의 큰 덩치를 넘어뜨렸는지 모른다. 그 바닥과 정점을 잇는 가장 빠르고 높은 지점에 기황후가 있었다. - 이상 이빈섬(아시아경제 편집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