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무연고 사망자에게 준 상처는 죽음이 아닙니다. 자극적인 언론의 보도, 차가운 자본의 논리, 사람들의 편견, 애도받을 권리의 박탈입니다. 완연하게 피어난 봄을 맞이하며 더는 무연고 사망자의 존엄을 상처 입히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자신을 위해 어떠한 변명도, 변호도 할 수 없습니다. 죽은 자의 존엄함을 지켜주는 것은 결국 산 자들의 몫입니다.
코로나는 장례식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코로나 사망자의 장례절차는 그 동안 ‘선화장 후장례’가 원칙이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방역지침이 바뀌면서 장례를 모두 치르고 화장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원칙에서 무연고 사망자는 예외입니다. 아직 뚜렷하고 명확한 업무 프로세스가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화장 후 따로 날을 잡아 뒤늦게 장례식을 치르고 있는 상황입니다.
안치실 이용 자격: 가족, 3일장
최근 서울시 공영장례지원 상담센터에 안치실에 대한 상담요청이 늘고 있습니다. 요양병원, 동주민센터, 경찰 모두가 안치실을 구하지 못해 힘들어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여러 충격적인 상황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안치실을 구하지 못한 경찰이 변사자를 무연고 시신이라 주장하며 동주민센터와 구청에 알아서 안치하라고 요구하며 서로 떠넘기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여기에 당장 가족이 나타나지 않은 고인은 받아주지 않겠다는 장례식장의 입장이 더해져 결국 고인은 폴리스라인이 쳐진 집에 나흘동안 방치되었습니다.
피해는 무연고 사망자에게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어 3일장을 치를 수 없는 빈곤계층에게도 차별이 생기고 있습니다. 3일 내내 빈소를 마련하고 사용료를 내야지만 고인을 받아주겠다는 장례식장의 말에 나눔과나눔의 안내에도 차질이 생기고 있습니다.
혹여나 장례식장의 협조가 가장 중요한 ‘저소득시민 공영장례’에도 영향이 끼치지 않을까 걱정이 커지고 있습니다.
고통을 참는 사람들
우리는 아프면 병원에 갑니다. 거의 모두가 건강보험의 적용을 받고, 혹시 고액의 비용이 발생하더라도 개인적으로 들어둔 의료보험 등을 통해 부담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세상에 돈이 없어 병원을 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잘 생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빈곤 때문에 혼자 고통을 참고 견디다 죽고마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3월에 장례를 치른 고인은 몸에 퍼진 암세포 때문에 끔찍한 고통을 느꼈지만 돈이라는 차가운 현실 앞에 그저 참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선생님 병원비 얼마에요? 병원비 얼마나와요?”
장례에 참여한 사실혼 배우자는 고인이 응급실에 실려가는 동안 구급대원에게 했던 질문이 너무 서럽게 마음에 남았습니다. 암세포가 몸에 퍼져 고통이 극심했던 순간에도 고인이 걱정하던 것은 병원비였기 때문입니다.
“병원에 가서 입원 시키려는데 주민등록이 말소가 됐다는 거예요. 그래서 병원비가 엄청 나왔어요. 비급여 치료를 하다보니 천만원 단위로 병원비가 청구되었어요… 있는 돈 다 끌어모아도 병원비를 낼 형편이 안되더라고요. 이미 암으로 의식불명인 사람의 주민등록을 살릴수도 없는 상황이고요.”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동거를 했기에 고인의 주민등록 말소 여부를 사실혼 배우자는 미리 알 수 있는 방도가 없었습니다. 형편이 나아지면 혼인신고도 하고 제대로 결혼생활을 해볼 생각이었는데, 사는게 바빠 미루다가 결국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던 사실혼 배우자는 고인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승화원을 떠났습니다.
산 자들의 몫
장례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슬퍼하고 애도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당신을 잃은 우리는 이렇게나 슬프다. 그러니까 당신은 이렇게나 소중하다.’ 무연고 사망자도 다르지 않습니다. 2020년에 사망한 3천명의 무연고 사망자는 그 커다란 숫자 앞에 하나로 뭉뚱그려집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커다란 숫자를 구성하는 모두는 각자의 존엄을 지닌 사람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무연고 사망자 급증’이라는 자극적인 한 문장으로 그 존엄이 훼손 당해선 안 됩니다. 안치료를 부담할 가족이 없어 빈 집에 덩그러니 방치되는 일이 벌어져선 안 됩니다.
코로나가 무연고 사망자에게 준 상처는 죽음이 아닙니다. 자극적인 언론의 보도, 차가운 자본의 논리, 사람들의 편견, 애도받을 권리의 박탈입니다. 완연하게 피어난 봄을 맞이하며 더는 무연고 사망자의 존엄을 상처 입히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자신을 위해 어떠한 변명도, 변호도 할 수 없습니다. 죽은 자의 존엄함을 지켜주는 것은 결국 산 자들의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