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은 산 자와 죽은 자가 어울려 꾸민 '축소된 우주'

  • 등록 2014.01.03 20:4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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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벽화라 하면 달리는 말위에서 몸을 틀며 활시위를 당기는 무사가 먼저 떠오른다. 뒤이어 쫓겨 달아나며 뒤돌아보는 사슴과 호랑이와의 팽팽한 긴장이 압권인 무용총 수렵도가 환기된다. 그렇듯 벽화 그림을 통해 고구려인들의 역동적인 모습을 가슴에 아롱 새기고 있다. 고분벽화는 4세기부터 7세기 중엽 사이 고구려에서 가장 성행했던 장의예술로 고구려에 편중되어 있다. 현재까지 발굴 조사된 90여 기의 우리 벽화고분 대부분이 평양, 안악, 개성 송도와 중국의 집안지역에 분포된 고구려 고분벽화이고, 남한에서 발견된 것은 단 5기에 불과하다. 백제고분 2기(공주송산리 6호분과 부여 능산리 고분)와 가야고분 1기(고령 고아동 고분), 그리고 영주 순흥 지역의 고분 2기가 전부다.고분벽화는 고대 회화의 발달사 연구에 절대적 위치를 차지할 뿐 아니라, 그 안에 깃든 조상들의 숨결과 삶의 모습을 느끼고 미의식을 이해하기에 더 없이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더구나 남한에서는 고분벽화 자체가 희귀한 터라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1985년 발견된 순흥 읍내리 벽화고분(사적 313호)은 남한에서 발견된 벽화고분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 산재한 고분 가운데서 무덤벽화가 발견된 예는 한 곳도 없다. 신라는 무덤을 만드는 방식에서 고구려와 차이가 있다. 돌을 쌓아 묘실을 만들고 그 위를 흙으로 덮는 고구려와 달리 돌무지 덧널무덤 구조이기 때문에 신라 고분에서는 우선 그림 그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할 수 없었다. 통일신라 무렵엔 신라에도 돌방무덤이 축조되지만 벽화는 마련되지 않았다. 그런데 6세기 초 순흥면 일대는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으로 명목상으로는 고구려 영토였지만 신라인들이 살았으며, 신라가 영토 확장을 위해 여기를 통과해 죽령을 넘기도 했다.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고구려식 신라 벽화고분을 이곳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 버려진 고분에서 발견한 벽화

 
1960년대 중반부터 대구·경북지역 골동품상 사이에는 영풍군 순흥면 어딘가에 벽화고분이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그 소문을 토대로 1971년 영풍군 순흥면 태장리에서 최초의 신라벽화고분인 ‘어숙묘(於宿墓)’를 발견하였다. 무덤의 구조는 경주 통일기 석실분의 특징을 보이지만, 벽화는 고구려 벽화분의 특징과 성격이 짙게 배여 있다. 신라에서는 한참 변두리인 순흥의 비봉산 중턱에 위치한 이 묘의 주인공은 고구려계 신라 관리로 추정되며, ‘을묘년어숙지술간(乙卯年於宿知述干)’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연대(595년)의 추정도 가능한 돌방무덤이었다. 이 무덤은 곧바로 사적 238호에 지정되었다. 마을 주민의 말에 따르면 발굴 전 오랜 기간 묘벽에 바른 횟가루를 뜯어먹으면 만병통치라는 어처구니없는 속설이 나돌아 벽화 역시 심하게 훼손되었다. 지금은 거의 퇴락하여 천장의 연꽃 그림과 인물상만이 희미하게 남아있으나 모형조차 남기지 않고 덮어버린 상태다.


그것으로 순흥면 일대의 벽화무덤을 둘러싼 소문의 진상은 규명된 듯 보였으나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1980년대부터 순흥의 벽화고분에 대한 소문이 다시 나돌았다. 도굴꾼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내용들이었다. 대구대학교 이명식 교수의 귀에도 그 소문이 흘러들었을 것이다. 1985년 1월27일 지금으로부터 꼭 28년 전이다. 이명식 교수는 어숙묘에서 불과 1㎞ 떨어진 순흥면 읍내리 일대에서 학생들과 함께 유적 지표조사를 하고 있었다. “이상한 무덤 하나를 발견했어요. 다른 폐고분들은 다 눈으로 덮여 있는데 유독 한 무덤은 눈이 쌓여 있지 않고 흙빛 그대로였어요. 도굴된 무덤이었지요.” 도굴 구멍은 사람 하나가 겨우 들어갈 정도의 크기였다. 본능적으로 내부를 살피고자 몸을 들이미는데 어두운 무덤 내부엔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무덤 북벽에 연꽃과 함께 구름 그림이 보였던 것이다. “숨이 멎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발에 걸리는 것이 있어 보았더니 인골이었어요.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지요.” 아마 당시엔 영화 ‘인디아나 존스’에서 존스박사가 된 기분이었을 것이다. 일단 철수하고 며칠 뒤 다시 무덤을 찾아 정신없이 실측하고 촬영했다. 학교로 돌아와 필름을 인화한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인물상이 선명하고, 벽면에 먹으로 쓴 글씨 9자 ‘기미중묘상인명OO(己未中墓像人名OO)’를 발견한 것이다.


순흥 읍내리 벽화고분의 극적인 부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무덤내의 유물들은 이미 도굴범이 싹쓸이해간 상태였고, 인골만이 도굴로 인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이명식 교수는 문화재관리국에 정식 발굴허가를 신청하고서 6개월 뒤에야 국립문화재연구소와 대구대 공동으로 본격적인 발굴을 실시할 수 있었다. 보안을 유지하며 추진하는 과정에서 청와대 보고용 서류를 모 신문사 기자가 선수를 치고 읽어버린 바람에 부랴부랴 기자회견을 갖게 되었고 다음날 전국 신문의 1면 톱기사로 게재되는 일화가 있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현장을 방문한다는 정보가 있어 순식간에 비포장이던 풍기~순흥간 6㎞ 도로변을 꽃으로 장식하는 등 야단법석을 피운 일도 있었다. 발굴 전부터 세간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던 것에 비하면 지금은 확연한 격세지감이 느껴질 정도로 고분은 적요했다.

 

 

 

◆ 인골의 주인공, 그 정체

 우여곡절을 겪으며 한여름 무더위 속에서 본격 발굴이 시작됐다. 발견된 인골을 찬찬히 맞추어보니 모두 9명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40세 넘은 남자 한 명에 나머지 뼈들은 모두 20세 남짓의 여성이란 점이다. 발굴단 사이에 농이 터졌다. “이거 첩들 아니야?” 물론 지금도 그 인골의 주인공과 그들의 관계를 명확히 알지는 못한다. 다만 무덤의 주인공은 고구려인이거나 신라에 귀화하여 지위를 누린 인물로 추정할 뿐이다. 이명식 교수 등의 주장대로 ‘기미년’을 539년으로 간주하고 그때 조성된 고구려 무덤이라면 무덤의 피장자는 고구려가 파견한 지방통치세력일 가능성이 크다. 순흥 지역은 신라 진흥왕이 551년 북진하기 전까지 40여 년간 고구려 영토였다는 점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 그런데 왜 9명이란 많은 사람의 인골이 한꺼번에 묻혀 있는가. 주인공의 사후에 함께 묻힌 순장이 아닌가. 가족 무덤이란 주장도 있으나 함께 묻혀 있는 인골이 모두 비슷한 나이의 여성이란 점을 감안하면 가족장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결국 ‘기미년’은 순장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다.


순장이 신라 지증왕 3년(502년)에 금지됐다는 점을 주목한다면 이 무덤은 순장이 실시되던 간지, 즉 479년에 조성된 것이란 추론도 가정하다. 또한 고구려 벽화고분은 주로 지안·평양 등 수도에 국한되어 있고 중앙귀족에게만 허용된 묘제란 점을 환기한다면 이곳 순흥이 신라의 변두리이기도 했지만 고구려의 변방이었으므로 굳이 고구려 귀족의 무덤을 이곳에 쓸 까닭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라의 가장 북쪽 외곽인 이 지역에 정착하게 된 고구려계 주민의 이주집단 혹은 그 후예일 가능성도 유력하게 제기된다.

 

 

◆ 숨은 그림 찾기

 

‘기미(己未)’라는 간지가 있어 무덤의 연대를 5~6세기로 대충 추정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지만 결국 479년이냐 539년이냐는 명확히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연도에 따라 고구려 벽화고분인지,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신라고분인지 달라질 수 있다. 벽화는 천장을 제외하고 모든 벽면에 회를 바르고 그 위에 묵선으로 형태를 잡은 후 채색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그림은 솔직히 세련되었다고 하기엔 왠지 좀 허술하고 조잡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화려하진 않지만 소박함이 묻어나오는 벽화였고 각각의 그림들은 여러 사연을 내포한 듯 보였다. 상당부분 회벽이 뜯겨나가 그림이 훼손된 점은 역시 아쉬운 대목이다. 특히 동벽엔 훼손이 심한 편이어서 새들과 12cm 높이 산의 형상만이 남아있고 북벽엔 동벽에서 이어진 산의 봉우리가 보이고 활강하는 새가 세 마리 그려져 있다. 그 옆으로 무리지어 핀 연꽃과 구름도 보인다.


남벽에는 물고기 모양의 깃발을 든 사람과 글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서벽엔 늘어진 능수버들과 함께 흐릿하게나마 큰 부채를 잡고 있는 여인상을 볼 수 있다. 여인의 얼굴은 고개를 약간 돌려서 북벽을 바라보는 모습이며, 왼쪽에 희미하게 또 다른 여인이 있어 2인 이상으로 파악된다. 어쩌면 무덤에서 발견된 인골의 신분과 어떤 연관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들 그림들은 고구려벽화에 흔히 보이는 사신도(청룡, 백호, 현무, 주작)와는 무관하지만 고구려의 영향이 강하게 작용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현실로 들어가는 널길의 좌우벽면엔 사악한 기운을 막고 무덤을 지키는 수문장으로 추정되는 역사(力士)가 그려져 있다. 서벽엔 두 손에 뱀의 목과 꼬리를 틀어쥔 채 널길 쪽을 향하여 막 달려 나가려는 듯한 자세의 짧은 잠방이 차림 사내의 모습이고, 동벽에는 불그스름한 살결에 코는 뭉툭하고 눈은 부리부리하여 고약하게 생긴 사내가 긴 삼지창을 잡고 있는 그림이다.


머리 위로 뿔 같기도 하고 더듬이나 안테나처럼도 보이는 모습은 마치 ‘ET’를 연상케 한다. 당시 진화한 외계생명체와 조우한 기록은 없으니 그 상상은 접기로 하고, 아무리 봐도 우리 조상님 얼굴은 아니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가끔 등장하는 영락없는 서역인의 모습이다. 그리고 고구려 역사들은 귀고리를 달지 않지만 신라인들은 귀고리를 무척 애용했다. 따라서 역사에게 귀고리를 패용시킨 것은 아무래도 신라적인 발상이라는 것이다. 순흥 읍내리 벽화고분은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문화교류가 매우 활발했음을 말해주고 있으며, 우리나라 회화사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를 많이 제공하였다. 그러나 일반의 관심은 좀 더 내밀한 그들의 일상적 삶에 닿아있다. 이를테면 여기에 묻힌 이들은 누구일까? 왜 옛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묻는 무덤에 그림을 그렸을까? 당시의 생활상은 어땠을까? 따위이리라. 당시엔 사람이 죽은 후에도 영혼은 죽지 않고 다른 세상에서 계속 살게 된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래서 산 자는 죽은 자가 딴 세상에서도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무덤에 쓰던 물건이나 아끼던 것들을 넣어 주고 그런 바람을 무덤 벽에다 그려 넣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심지어 한때 ‘순장’풍습도 있어 죽은 사람의 가족이나 시종을 함께 묻기도 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아쉽고 서운한 마음을 고분 벽화에 표현했다. 살아생전 행복했던 모습이나 자랑스러운 일들을 그려 넣기도 하고, 죽은 후의 세상과 여러 가지 신들의 모습을 상상해 그려 넣으며 죽은 자의 행복을 빌었던 것이다. 한편으론 산 자와 죽은 자가 헤어지는 과정이며,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경계에서 이루어지는 단절과 유대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두 세계를 잇고자 하는 의지 속에 죽은 자가 살았던 세계와 살아야 할 세계의 모습이 다양한 모습으로 상징되어 표현된 것이다. 그림 상호 간의 관계를 밝히기란 쉽지 않지만 나름대로 무덤 안을 하나의 축소된 우주로 꾸몄으리라 짐작된다.

- 권순진(시인·칼럼니스트)    [대구일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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