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군- "형사범 아닌 전쟁포로" ...◈2.전쟁-하얼빈 거사는 군사작전...◈3.사상-동양평회론...◈4.중국-쑨원 위안스카이 추모시 남겨 ◆10월 26일은 안중근(1879~1910) 의사의 ‘하얼빈 의거’ 100주년을 맞는 날이다. 이를 기리는 다양한 행사가 기획되는 가운데, 최근 중국 하얼빈에 세워졌던 안 의사 동상이 고국으로 돌아와 화제가 되기도 했다. 100년 전 그날, 안 의사는 ‘대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했고, 이듬해 3월 26일 뤼순 감옥 형장에서 31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역사의 기억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해석 이전에 놓쳐서 안 될 것은 사실 그 자체의 문제다. 우리가 소홀히 했던 것은 없었을까. 안 의사, 또 그의 거사와 관련된 사실을 ‘장군’ ‘전쟁’ ‘사상’ ‘중국’이란 4개의 키워드로 되짚어 봤다. |
그는 장군이었다. 우리는 ‘의사(義士)’라는 호칭에 익숙하다. 하지만 당시 그는 자신이 ‘대한의군(大韓義軍) 참모중장(參謀中將)’임을 명백히 했다. 어쩌다 한번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됐다. 첫 언급은 거사 직후 나왔다. 하얼빈역 구내 러시아 헌병대 분소에서 러시아 검찰관의 신문을 받을 때였다. 그는 성명을 ‘대한국인 안응칠(安應七)’, 연령을 31세, 신분을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이라고 했다. 그리고 “독립전쟁 중 한국 침략의 괴수를 처단 응징한 것”이라면서 자신의 거사를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규정했다. 이어 일본 법정에서도 자신이 대한의 장군임을 분명히 한다. 그의 공판기록 가운데 이와 관련된 대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문: 범행 동기가 무엇인가? 답: 나는 일본재판소에서 재판 받을 의무가 없다. 나는 한국의 의군 참모중장으로 독립전쟁을 하는 중이고 그 일환으로 이토를 포살하였다. 따라서 나는 형사범이 아니라 전쟁포로다. 문: 범행 후 자살을 기도했는가? 답: 나의 목적은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의 유지에 있다. 이토를 포살한 것도 사적 원한에서가 아니라 그런 목적에서였다. 그러나 아직 목적이 달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토 하나 죽이고 자살한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의사’란 ‘의로운 지사’를 뜻한다. 결코 나쁜 의미가 아니다. 의사도 맞고 장군도 맞다. 그러나 분명히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가 스스로의 신분을 장군이라고 거듭해서 밝혔다는 사실이다. |
2006년 중국 하얼빈시에 세워졌다 철거된 안중근 의사 동상. 하얼빈 거사 100주년을 맞아 최근 조국으로 돌아와 화제가 됐다. 현재 서울 여의도 국회 헌정기념관 앞에 임시 전시돼 있다. 그는 대한의 장군으로서 대일본 전쟁을 치렀다. 그의 거사는 치밀하게 계획됐다. 일회적이거나 우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는 1909년 10월 26일의 거사가 있기 세 해 전인 1907년 말부터 만주와 러시아 지역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계속해 왔다. ‘단지(斷指)동맹’은 그 같은 지속적인 투쟁과 그의 결연한 항전 의지를 입증해주는 사례다. 또 안중근 자신의 거사와 함께 우덕순 등 동지들로 하여금 이토를 사살할 또 다른 방안을 준비한 것도 그날의 거사가 결코 우발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입증한다. 안중근 자신이 하얼빈역에서 거사를 준비하고, 우덕순과 조도선 동지로 하여금 차이자거우(蔡家溝) 역을 맡게 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토를 포살할 경위를 묻는 신문에 다음과 같이 응했다. “나는 정정당당한 진(陣)을 펴고 이토의 한국 점령군에게 대항하기를 3년, 각처에서 의군(義軍)을 일으켜 고군분투 간신히 하얼빈에서 제승(制勝)하여 이토를 죽인 나는 독립군의 주장(主將)이라 할 것이다.” 당시 일본은 만주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쌓아가고 있었다. 뤼순 군항 건설을 마쳤고 남만주 철도도 뤼순·다롄에서 시작해 선양·창춘을 거쳐 하얼빈 인근까지 넓혀져 일본의 만주 점령 영역이 크게 확대되어가던 무렵이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을 방문한 것은 단순한 만주 여행이 아니었다. 이토의 의도는 만주와 몽골 지배를 놓고 러·일 협상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이토의 의도를 안중근은 동양평화를 교란하는 행위로 파악했다. 이토를 한국 침략의 원흉인 동시에 동양평화의 파괴자로 지목한 것이다. 안중근이 이토의 죄악상 15개조를 서면으로 작성해 관동도독부 법원 미조구치(溝口) 검찰관에게 제출한 것은 뤼순 감옥에 수감된 지 사흘 뒤인 11월 6일이었다. 일종의 ‘군사작전’이었던 하얼빈 거사는 안중근의 동양평화에 대한 신념에 의해 뒷받침되어 있었다. 그는 공판정에서 이토의 사살이 “동양평화를 지킨다”는 정의의 응징이었음을 분명히 했다. 옥중 기록인 『동양평화론』에서는 하얼빈 의거를 ‘동양평화의전(東洋平和義戰)’이라고 기술했다. 그는 뤼순지방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고등법원에 상고하지 않았다. 사형 집행장에서 최후의 유언을 묻자 “나의 이 거사는 동양평화를 위하여 결행한 것이므로 임석 제원들도 앞으로 한·일 화합에 힘써 동양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는 말만 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유해는 유족에게조차 전달되지 않았고 뤼순 감옥 죄수들 묘지에 묻히고 말았다. 그는 다음과 같은 유지도 남겼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힘쓸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는 그의 유해가 어디 있는지조차 모른다. |
그는 뤼순 감옥에 투옥된 5개월 동안 일생의 행적을 밝혀놓은 자서전 『안응칠 역사』를 저술했다. 이어 하얼빈 거사의 뜻을 밝히는 『동양평화론』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사형 언도 직후인 1910년 2월 17일 고등법원장과의 면담에서 “나는 지금 옥중에서 『동양정책: 동양평화론』과 『전기(傳記)』를 쓰고 있다. 이를 완성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예정된 사형을 15일 정도 연기시켜달라는 요청이었다. 그의 요청은 처음엔 받아들여지는 듯했으나 끝내 묵살되었다. 『동양평화론』이 미완인 채로 총론과 각론의 일절만 전해지는 이유다. 그의 동양평화론의 골간은, 한국과 중국·일본 3국이 각기 서로 침략하지 말고 독립을 견지하면서 서로 상호 부조하고 근대 문명국가를 건설하여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서구 제국주의를 막을 때 동양평화가 이룩될 수 있다는 내용으로 집약될 수 있다. 그의 평화사상은 오늘날 유럽연합의 지역공동체 구상보다 적어도 70년 이상 앞선 것으로 평가 받는다. 일본의 패권과 침략주의를 합리화한 대동아공영권 논리의 함정을 안중근은 근원적으로 꿰뚫어보면서 그에 대한 대안을 구상하고 있었다. 한·중·일 3국이 공동 관리하는 군항을 만들어 3국 청년들로 군단을 편성해 지키게 하고, 그들에게는 2개국 이상의 어학을 배우게 하여 우방 또는 형제의 관념이 높아지게 하자는 제안, 뤼순 지역에 한·중·일이 먼저 동양평화회의를 조직하고 이어 인도·태국·버마 등 동양 여러 나라가 참여하는 회의로 발전시켜 나가자는 구상, 한·중·일 3국이 참여하는 공동금융기구를 설치해 운영하자는 계획 등은 오늘의 관점에서 보아도 매우 구체적이며 선진적이다. 구한말 사학자 박은식은 『안중근전』의 서론에서 “안중근을 그의 역사에만 근거하여 논한다면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한 ‘지사(志士)’일 뿐 아니라 한국의 국구(國仇)를 갚은 ‘열협(烈俠)’이 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말(‘지사’와 ‘열협’)은 안중근을 설명하기에 부족한 것으로 생각한다. 안중근은 세계적인 안광(眼光)을 갖고 스스로 평화의 대표를 자임한 것이다.” [사진설명: 안중근 의사는 50여 편의 유묵을 남겼다. 동양평화에 대한 그의 의지는 유묵에서도 확인된다. “동양대세 생각하매 아득하고 어둡도다. 뜻있는 남아가 어찌 잠을 이루리. 평화정국 못 이루었으니 한탄스럽기 그지없다. 정략(침략정책) 고치지 않으니 참으로 가련하다(東洋大勢思査玄 有志男兒豈安眠 和局未成猶慷慨 政略不改眞可憐).”] ▷도움 받은 자료 윤병석 인하대 명예교수의 논문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의 역사적 의의’ (독립기념관 주최 2009 학술대회 자료집) ▷도움말 주신 분 김용달 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위원 안중근평화재단청년아카데미 이승희 지도위원장 ▷사진 제공 독립기념관, 안중근의사기념관 [ 이상 중앙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