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관장 최광식)은 경주 황남대총에서 발굴한 유물을 종합적으로 정리해 왕릉의 전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특별 기획전 ‘황금의 나라-신라의 왕릉 황남대총’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황남대총은 경주에 있는 신라 고분 중 가장 큰 것으로 두 개의 무덤이 합쳐진 표주박 모양의 쌍릉이다. 5세기 경 무덤으로 추측되며 문화재관리국이 1973년부터 약 3년간 발굴해 각각 남자와 여자의 무덤 즉, 부부릉으로 조사됐다. 특히 황남대총은 신라 마립간(4세기 경 신라에서 사용한 왕의 칭호)의 능 중 하나로 꼽힌다. 왕릉 축조시점을 추론해 절대연대와 당시 문화 유형을 살펴볼 수 있어 학계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
전시는 7일부터 다음달 21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1층 특별전시실에서 열린다. 한편 전시에 앞서 6일 언론공개 및 개막식이 있으며, 개막식에는 가야금 명인 황병기 선생이 참석한 가운데 ‘침향무’가 연주될 예정이다. 연주는 황 선생의 제자 지애리 씨가 맡았다. |
▶경북 경주시 한복판 대릉원에 있는 신라 황남대총. 남북 길이 120m, 높이 22m로 국내에서 가장 큰 고분, 1975년 발굴에서 금관 등 2만2000여 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온 고분. 그동안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이 고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국립중앙박물관이 7일부터 10월 31일까지 동아일보 후원으로 개최하는 특별전 ‘황금의 나라 신라왕릉 황남대총’을 계기로 고분 주인공에 다시 관심이 쏠릴 것으로 보인다. 이번 전시를 통해 무덤 주인공이 5세기 초 실성왕일 수 있다는 연구 성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함순섭 학예연구관(고고학)은 전시도록에 수록한 논문 ‘황남대총을 둘러싼 논쟁, 또 하나의 가능성’을 통해 실성 마립간(실성왕·재위 402∼417년)설을 제기했다. 황남대총은 두 개의 무덤이 합쳐진 표주박 모양의 부부 쌍분, 고고학계에선 5세기 무덤으로 보고 있다. 발굴 결과 남분은 왕인 남자의 무덤, 북분은 왕비인 여자의 무덤으로 확인됐다. 남분이 먼저 조성되고 후에 여기에 붙여 북분을 조성했다. 황남대총의 주인공은 금 허리띠와 화려한 칼을 찬 남자다. 전문가들은 주인공이 왕(마립간)일 것으로 추정한다. 주인공에 관한 그동안의 학설은 1980년대 눌지 마립간(눌지왕·재위 417∼458년)설, 1990년대 내물 마립간(내물왕·재위 356∼402년)설로 나뉘었다. 그러나 뚜렷한 물증이 없기 때문에 더는 논의가 진행되지 않았다. |
그는 “실각한 왕이라고 해서 왕릉이 작아야 할 이유는 없다”며 “오히려 뒤를 이은 눌지왕이 죽은 왕(마립간)의 권위를 올려주면서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왕릉을 크게 조성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실성왕의 큰 키도 또 다른 근거다. 고대 기록에 따르면 실성왕은 키가 7척 5촌이었다. 이는 180cm 내외. 함 연구관은 “황남대총 남분 주인공의 금동관 끝에서 허리띠드리개 맨 끝까지가 181cm였다”고 말한다. 실성왕의 키와 출토 상황이 일치한다는 말이다. 이번 전시는 금관, 새날개 모양 금관장식, 금제허리띠, 금동관, 둥근고리칼(환두대도), 옥충장식 말안장, 서역에서 들어온 봉수형 유리병과 유리잔 등 1200여 점을 선보인다. 전시는 ‘마립간, 황금의 나라 신라를 열다’, ‘무덤, 권위를 잇는 계승의식’, ‘주변 국가들과의 대외교류’, ‘황남대총 사람들의 삶’으로 나누어 진행된다. ■ 왕비가 금관을? ▶왕 무덤선 격 낮은 금동관 출토, 도굴당하지 않은 이유도 궁금 전시에선 황남대총에 얽힌 다양한 미스터리도 만나볼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금관의 실체. 2000년대 들어서면서 실용품이 아니라 죽은 자의 얼굴을 뒤집어씌우기 위한 의례용 데드마스크라는 설이 확산됐다. 그러나 최근 다시 왕이 생전에 직접 사용했던 실용품이라는 분석이 유력시되고 있다. 전시장 곳곳에서 또 다른 미스터리가 관객을 기다린다. 왜 여성의 무덤에서 격이 더 높은 금관이 출토되고 왕인 남자의 무덤에서 격이 낮은 금동관이 출토됐을까, 신라 사람들은 언제부터 거대한 봉토 무덤을 만들었을까, 황남대총은 왜 도굴당하지 않았을까, 황남대총엔 왜 수리한 물건이나 훼손된 물건도 함께 부장했을까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