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대천에서 배 타고 1시간 넘게 들어가는 섬, 삽시도(揷矢島). 섬 소년은 두 살 때 소아마비를 앓고 하반신을 못 쓰게 됐다. 혼자서는 집 밖에 나갈 수 없었고, 학교 문턱에도 못 갔다. 작은형 등에 업혀 두 달에 한 번 이발소 가는 게 소년의 유일한 외출이었다. 초가집에서 4~5m 떨어진 '뒷간' 가는 일이 고역이었다. 두 손에 신발을 끼우고 비닐 비료 포대에 앉아 팔로 마당을 짚어가며 옆으로 움직였다.
소년이 열세 살 되던 해에 어머니가 울면서 말했다. "너는 어미 죽을 때까지만 살아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먹고살려면 배워야 한다.' 문맹(文盲)이던 소년은 형·누나에게 한글을 알려달라고 졸랐다. 한글을 깨친 뒤 영어 알파벳을 외웠다. 소리 내 영어를 읽는 게 좋았다. 소년은 대천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사촌형에게 부탁해 영어 책을 한 달에 5~6권씩 받아 굶주린 배를 채우듯 닥치는 대로 읽었다.
이 삽시도 소년은 그로부터 37년 뒤, 서울시장이 주는 상을 받았다. 서울 방화동에 사는 강남국(56)씨는 15년간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무료 영어 과외를 한 공로로 2007년 '서울시 봉사상'을 받았다. 강씨는 상을 받은 뒤에도 방화 2·11복지관에서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7년째 영어를 무료로 가르치고 있다.
강씨가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한 건 1977년, 스무 살 때다. 강씨는 당시 충남 대천의 중학교로 유학 간 막내아우를 뒷바라지하려고 대천에서 동생과 함께 살았다. 독학으로 터득한 강씨의 영어 실력이 상당하다는 얘길 들은 대천의 친척들이 찾아와 강씨에게 아들 영어 과외를 부탁했다. 강씨의 실력은 놀라웠다. 영어 성적이 70점도 안 되던 아이가 두 달 만에 100점을 받아오게 됐다는 소문이 퍼져 학생이 몰렸다. 그렇게 '과외 선생'이 돼, 9급 공무원 월급이 3만원 조금 넘던 시절 월수입이 15만원이나 됐다.
그러나 곧 시련이 닥쳤다. 1980년 전두환 전(前) 대통령의 '7·30 교육 개혁 조치'로 과외가 전면 금지되면서 강씨의 호시절은 3년 만에 끝났다. 수입이 끊어진 그는 공공 기관에 수십 번 원서를 냈지만 '중증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면접조차 보지 못했다. 강씨는 그간 번 돈과 대천에 유학 온 조카들을 돌봐주며 받는 돈으로 살아갔다.
겨우겨우 연명하던 강씨에게 '한 줄기 빛'이 내려왔다. 1988년 "다리를 고칠 수 있다"는 병원을 소개받았다. 수술비 400만원을 마련할 길이 없었지만 형제들이 돈을 모아줬다. 수술대에 오른 강씨는 "한 번이라도 설 수 있다면 어려운 사람들을 가르치며 살겠다"고 기도했다. 1년 만에 강씨가 처음 목발을 짚고 서던 날, 어머니는 강씨를 붙잡고 울었다.
강씨는 1991년 퇴원해 '새 출발을 하겠다'고 마음먹고 무작정 서울로 갔다. 큰조카에게서 돈을 빌려 월세 5만원짜리 방을 얻었다. 강씨는 2년여간 영어 과외를 하며 한 달에 60만원 정도를 벌었다. 생활이 조금씩 안정되자 강씨는 1994년부터 '무료 영어 과외'를 시작했다. 부모 중 한 명이 장애가 있는 학생, 기초생활수급자 가정의 초·중학생 자녀가 대상이었다. 이후 13년간 초·중학생 80여명에게 무료로 영어를 가르쳤다. 2004년엔 검정고시로 초·중·고 졸업장을 땄고 2005년에는 한국방송통신대 영문과에 입학해 내년 2월 졸업을 앞두고 있다.
2007년부터는 건강이 안 좋아졌지만 일주일에 네 번 하는 복지관 강의는 계속 나갔다. 2001년부터 한 달 40만원 정도의 보조금만으로 생활하고 있지만 강씨는 "그 돈만으로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의 목표는 "초·중학생 무료 과외를 다시 시작해 죽기 전에 '어린 제자' 100명을 채우는 것"이다. 지난 5일 오전 서울 강서구 방화2복지관 3층 10평(33㎡) 크기 강의실. 한창 수업하던 강씨가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보며 말했다. "이츠 러블리 데이, 이즌 잇?(It's lovely day, isn't it?)"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