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남북녀 전통혼례, 통일한국미리보는듯

  • 등록 2010.10.26 11: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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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파견근무하던 신랑, 탈북여성과 운명적 사랑, "7년 전 약식婚 미안했는데 이번에 한 풀게 됐어요"
▶지난 23일 오전 11시 서울 중구 필동 남산국악당 마당에 파랑·주황·초록·노랑·보라색 오색 천이 내걸렸다. 가야금·장구·해금·피리 등이 어우러진 흥겨운 국악 소리가 장내에 가득한 가운데 탐스러운 사과·배·대추 등이 놓인 전통혼례상이 차려졌다. "신랑 출(出)!" 이날 전통혼례 주례를 맡은 서울시 홍보대사 탤런트 최불암씨가 소리치자 보라색 혼례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최진흥(50)씨가 당당히 입장했다.

"신부 출(出)!" 이번에는 연지곤지 찍고 빨간 전통혼례복을 곱게 차려입은 김명순(가명·35)씨가 꽃가마를 타고 들어와 12개의 청사초롱이 걸린 길을 따라 우아하게 들어왔다. 신랑과 신부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 ▲ 지난 23일 중구 필동 남산국악당 마당에서 탈북자 신부 김명순(가명)씨와 남한의 신랑 최진흥씨가 전통 혼례를 올리고 있다
이들은 "남남북녀"(南男北女) 커플로, 탈북자 출신의 신부 김씨가 한국에 온 지 7년 만에 서울시의 도움으로 정식 전통혼례를 올리게 됐다. 이들 부부는 지난 2003년 김씨가 남한에 오자마자 결혼했지만, 당시는 쫓기듯이 약식으로 간단히 식을 올려 아쉬움이 남아있었다.

신부 김씨는 함경남도 함흥시 흥남구역 출신이다. 2년제 간호학교에 다니던 그는 1998년 학교에 내야 하는 쌀 20㎏과 휘발유 20L가 없어 몰래 두만강을 건넜다. 김씨는 "북한에서 방학이 되면 우리 집 일곱 식구가 10년 모아야 하는 액수의 물건을 학비 명목으로 내야 한다"며 "중국에 사는 친척들에게 손을 벌려 학비를 마련해 다시 돌아오려고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이 어긋났다. 중국에서 친척들의 도움을 받은 그는 다시 북으로 돌아오다 군인에게 붙잡혀 짐은 다 빼앗기고 심한 고문을 당했다. "북에서 학교에 다니기 위해 두만강을 건넜고, 다시 돌아왔는데 잔혹하게 고문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어요. 이게 내가 살아야 하는 조국이 맞나 싶었죠. 어차피 죽을 거면 자유가 있는 곳으로 가자고 생각해 풀려나고서 다시 강을 넘었습니다."

1998년 7월 27일 국경을 넘은 그는 중국 연길의 식당을 전전하다 다롄(大連)의 한식당에 취업했다. 신분증을 위조해 조선족 행세를 하던 김씨는 2000년 10월 식당을 찾아온 최씨를 만났다. 당시 한국의 건설회사 하도급 업체에 근무하던 최씨는 건설 현장팀장으로 중국에 파견 근무 중이었다. 노총각이던 최씨와 탈북자 김씨는 첫눈에 호감을 느꼈다. "남편이 휴일 아침 일부러 식당으로 연락해 반찬과 음식을 주문했어요. 제 얼굴을 보겠다는 생각이었죠. 항상 긴장하며 살던 저도 그 사람을 만나면 참 편안해지더라고요."

이들은 만난 지 한 달 만에 결혼을 약속했다. 최씨는 "아내는 그전까지 불안해서인지 조선족이라고만 하다가 결혼을 약속하고 나서야 탈북자인 것을 밝혔다"며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아내를 남한으로 데리고 올 준비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최씨는 불법으로 여권을 발급받기 위해 뇌물을 써서 김씨의 위조 신분증을 만들었다. 하지만 가짜 신분증으로 여권을 신청한 김씨는 2002년 8월 중국 공안에 발각돼 50일간 중국 연길의 감옥에 갇혔다.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들은 최씨는 중국 공안 3명에게 뇌물을 주고 호송 중인 김씨를 간신히 빼내는 데 성공했다. 가까스로 풀려난 김씨는 2002년 10월 다시 위조 신분증으로 여권을 받아냈고, 태국의 대한민국 대사관을 거쳐 2003년 2월 한국 땅을 밟았다. 탈북에 성공한 이들은 탈북자 정착지원 시설인 하나원을 퇴소한 지 일주일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최씨는 "탈북과정에서 아내의 몸이 많이 약해졌지만, 그동안 외줄타기 같았던 불안한 생활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기 위해 약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고 말했다.

남한생활 7년째에 접어든 부부는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것이 늘 아쉬움으로 남았는데, 북한 이탈주민 축제를 기획하던 서울시의 주선으로 전통 혼례식을 올릴 수 있었다. 지난 21일 서울 청계천 두물다리 인근 "청혼의 벽"에서 프러포즈를 한 신랑 최씨는 "반지 하나만 달랑 해주고 정식 프러포즈도 없이 쫓기듯이 약식 결혼식을 올린 게 항상 마음에 걸렸는데, 이번에 오래된 한을 풀게 됐다"고 말했다.

이날 결혼식에는 북에 있는 김씨의 가족 및 친족들을 대신해 남한의 탈북자 100여명이 참석했고, 결혼식은 서울시가 주최한 "북한 이탈주민과 함께하는 음식·문화 나눔 한마당"으로 꾸며졌다. 탈북 아동을 위한 프로그램인 "무지개학교"에 참여하는 탈북소녀 5명이 북한의 결혼식 때 부르는 "축복하노라"라는 노래를 불렀고, 남한에서 자주 부르는 "아름다운 세상"이라는 축가도 들려주었다. 결혼 피로연은 북한산 잣과 호두, 고사리 등과 남한의 쌀이 섞인 "통일 비빔밥"으로 풍성하게 차려졌다. 3년 전에 북에서 왔다는 이모(80)씨는 "남과 북이 하나 된 만남의 장이었다"고 했고, 이용선(69)씨는 "통일된 이후의 모습을 미리 본 것 같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뉴스관리자 기자 infoi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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