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나무에서 피어나는 향기 -변성식 소장

  • 등록 2026.03.02 15: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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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가 대지를 적시며 생명의 맥박을 깨우는 아침입니다. 촉촉이 젖은 땅 위로 피어오르는 흙 내음을 맡으며, 우리는 문득 '쓰임'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세상은 흔히 생산성과 속도로 가치의 척도를 삼곤 하지만, 만물의 소생을 돕는 이 비처럼 노년의 시간 또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삶을 적시는 숭고한 효용을 지니고 있습니다.

 

노년에 있어 '쓸모'란 단순히 무언가를 생산하거나 기능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여전히 누군가에게, 혹은 이 세상에 연결되어 있다는 실존적 감각이자 살아있음의 증거입니다. 젊은 시절의 쓸모가 외연을 확장하고 성과를 쌓아 올리는 '도구적 가치'였다면, 노년의 쓸모는 삶의 굴곡을 견뎌낸 존재 그 자체가 발산하는 '존재적 가치'로 전이됩니다. 마치 오래된 고목이 열매를 맺지 못할지언정 그 넓은 그늘만으로도 지친 이들에게 쉼터가 되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사회적 역할에서 물러나며 자신의 효용성이 다했다는 상실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노년의 쓸모는 타인의 시선이 아닌, 내면의 성찰과 지혜의 나눔에서 시작됩니다. 수많은 상처와 기쁨이 교차하며 빚어낸 시간의 퇴적물은 후세대가 가보지 못한 길의 지도가 됩니다. 조급함 대신 기다림을, 갈등 대신 화해를 선택할 수 있는 여유는 노년만이 건넬 수 있는 귀한 선물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따뜻한 위로 한마디를 건넬 수 있을 때, 혹은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평온한 뒷모습을 보여줄 때, 노년의 삶은 비로소 가장 찬란한 쓸모를 증명하게 됩니다.

 

결국 노년의 쓸모란 '무엇을 하느냐(Doing)'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존재하느냐(Being)'의 문제입니다. 육체적 쇠락은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섭리이지만, 그 안에서 피어나는 정신의 향기는 시간의 흐름을 이겨냅니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배움을 멈추지 않고, 주변을 돌보며, 죽음이라는 삶의 마지막 과업을 담담히 준비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고귀한 교육입니다.

 

이 봄비가 그치고 나면 세상은 더욱 선명한 초록으로 물들 것입니다. 우리의 노년 또한 세상을 적시는 비가 되어 누군가의 마음속에 깊이 스며들기를 소망합니다. 쓸모가 있다는 느낌은 타인이 부여하는 자격증이 아니라, 스스로 삶을 사랑하고 그 가치를 믿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존재함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그 깊고 너른 노년의 바다 위에서 우리는 비로소 참된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마음건강연구소

큐레이터 김동원 기자 infoi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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